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 세상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재수생반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첸니엔(주동우). 가난하고 모범생일 뿐인 이 여학생의 꿈은 공부 잘해서 대학 가고,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엄마와 편하게 살고 싶은 것 뿐이다. 공부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던 첸니엔은, 학교에서 괴롭힘에 시달리는 친구의 자살 장면을 목격한 후 인생이 뿌리째 흔들린다. 죽을 만큼 괴로웠던 그 친구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죽은 아이의 시신에 옷을 덮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첸니엔은 큰 혼란에 빠진다. 또 첸니엔은 그 죽은 아이가 괴롭힘당했던 사실을 경찰에게 말했다는 이유로, 학교 폭력 집단의 다음 공격 대상이 된다. 하지만 집으로 도망갈 수도 없다. 빚쟁이들이 매일 첸니엔 모녀를 괴롭혔다. 세상 누구도 자기를 지켜줄 수 없다는 현실 속에 혼자 어둠 속에서 흐느낀다.
한편 영화는 학력 지상주의를 잔인하게 해부하고 있고, 그 점에서 우리나라 교육환경과 상당히 닮아있다. 학생들에게 대학 입시는 거의 ‘종교’에 가깝고,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그들의 아우성은 ‘광신도’의 포효로 들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진 거라고는 ‘공부 머리’ 밖에 없는 첸니엔에게, 가난에서 탈출하는 열쇠 또한 대학 합격이다.
첸니엔에게는 대학 입시가 ‘생존’의 문제였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정하는 어른들의 논리와도 충돌한다. 특히 경찰서에서 첸니엔을 신문하는 여형사와의 대화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네가 겪은 일은 마음 아프지만
어른들을 믿고 말했어야 우리가 도와주지”
“누가 나를 도와줘요? 구경꾼?
그렇게 당한 건 내 탓이라고 손가락질한 사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고 싶으세요?”
첸니엔에겐 복수라는 감정도 사치였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잔인한 세상에서 숨 쉬고 살려면, 생계형 학업에 집중해야 했다.
이때 첸니엔을 지켜주는 건 어른과 선생님, 법이나 제도, 경찰이나 공권력이 아닌, 세상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거리의 건달 리우 베이샨(이양천새 분)이었다.
그는 세상에 버려진 또 다른 청년이다. 단 한 번도 누가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지 않았기에, 첸니엔의 ‘괜찮아?’란 한 마디에 눈물 흘렸다.
돈도, 부모 찬스도 없는 이 둘에게 세상은 등을 돌렸지만, 이 둘은 작은 공동체가 된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보았고, 그래서 여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줬다.
“넌 계속 걸어, 네 바로 뒤에 내가 있을게”
첸니엔은 뚜벅뚜벅 걸어간다. 때로는 우회해야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이 지키고 싶은 그 ‘세상’을 향해서 말이다.
영화에서 학교 폭력, 가난, 해체된 가족 등이 주인공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의 로맨스와 성장 영화적 주제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지켜줄게’이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그럼 현실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중국의 실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학교 안전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법과 규정만으로 이런 청소년들을 지켜낼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나 청소년의 삶은 균형감을 잃기 쉽고, 다양한 혼란과 삶의 변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공동체 의식과 공감과 포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도 누군가 ‘내가 지켜줄게’라고 나지막이 속삭여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외톨이들이 사회 곳곳에 숨죽이고 있지 않을까? 영화 속 리우 베이샨처럼 극적인 출현을 하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지켜줄게’의 손 내밀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영화가 제도와 법의 사각지대에서 세상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스러져가는 이들에게 ‘너를 지켜줄게’라는 메시지로 다가가길 바란다. 그리고 이 희망이 판타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거기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