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色)과 이성(戒), 그 정반합이 주는 비극
경계를 넘으려 하는 욕망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욕망을 경계(警戒)했음에도 인간의 욕망은 그 경계(境界)를 너무도 쉽게 넘어선다.
그 댓가는 상상이상으로 가혹하기에 대개 파멸에 이른다.
박스(Park's)무당 순실이도 그랬고 탕웨이도 결국 그리 된다.
9년 전 그녀를 오늘 다시 만났다. 그것도 무삭제판 벌거숭이로...
겨드랑이 털만으론 꿈쩍도 안하는 불감증 관객들을 위해 좀더 파격적인 볼거리가 추가되었고,
그 사이 현격히 저하된 나의 기억력으로 인해,
마치 처음 보는 영화처럼 157분간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분명 재탕으로 우려낸 탕웨이지만 그녀는 처음 느낌 그대로다.
강함과 약함, 청순과 요염, 순진과 영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현묘한 매력.
그 사이 알만큼 아는 중년 남자가 되어서일까? 아는 사람만 읽어 주길 바라는 듯한 그녀의 작은 손짓, 눈빛, 몸의 떨림이 주는 의미들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양조위의 우수어린 눈빛 연기도 압권이지만 역시 내 시선은 그녀에게로만 고정된다.
몇몇 감상평을 읽다보니 9년전 오리지널 필름에선 가학적이고 무자비한 첫 섹스씬만을 담았다고 한다. 무삭제판에선 살려 낸 일련의 정사 장면을 보니 비로소 감독의 세심한 연출의도를 읽을 수가 있었다. 상반된 욕망(수컷의 정복욕 vs 팜므파탈 스파이의 의도적 접근)의 충돌로 불붙은 서로에 대한 탐닉이, 사랑과 믿음이란 감정으로 합일되어 가는 과정을 그땐 알 도리가 없었다. 어둠에 대한 공포를 가진 양조위의 눈을 가리고 나누는 무한신뢰 정사 씬과, 절정으로 치닫는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두 사람의 처절한 몸부림이 지금도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탕웨이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맘이 먹먹해져, 현실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꽤 걸리곤 한다.
죄수(=만추)나 스파이(=색계)처럼 비극적 결말이 예상되는 배역 때문일까? 그녀에겐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생긴다. 언젠가 청순가련 꽃뱀 역할을 해도 썩 어울릴 듯 하다.
격변기의 사랑은 로맨틱하다. 요즘 시국이 그 시절 못지 않게 하수상'하야' 그런지 영화가 주는 아련함에 급우울해진다. 그나마 그 사이 오, 나의 여신 탕웨이가 한국사람이 된 걸 위안으로 삼아 본다.
갓 블레스 투 김태용,
얼마남지 않은 병신년은 빨리 갓!
丙申年 빼빼로데이에...
에필로그. 2년후 탕웨이의 남자와 즐건 술자리를 가졌다. 알고보니 대학 동기다. 참 멋진 분 to deserve to have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