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짧은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seo Oct 24. 2018

염력(2018) - 염력은 왜 부산행에 이르지 못했나



영화 '염력'은 공권력, 폭력, 권력의 세계에 말 그대로 염력을 개입시킨다.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 좀비라는 장르적 소재를 결합한 '부산행'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냈던 연상호 감독은, 본인의 흥행 공식을 한 번 더 가져온다. 냉정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초인, 히어로를 등장시켜 현실을 풍자하는 한편, 전복의 쾌감까지 주려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답습'만도 못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다른 재료, 같은 조리법


'부산행'의 좀비는 단순했다. 좀비물에서의 좀비는 보통 종말론적 불안, 절대적인 공포, 현대 과학에 대한 전복,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군중 심리 등을 상징하는데, '부산행'에서는 재난 상황 그 자체로 활용됐다. 부산행 기차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 되었고, 광기에 사로잡힌 좀비는 물어뜯고 사람들은 문을 막았다. 굉장히 단순한 구도에 납작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상징성이 직설적인 연출과 만나 실제 차려놓은 것보다 영화가 더 다채롭게 소비됐다.


'염력'의 초인은 단순하다기보다 게으르다. 좀비물과 직접 비교할 순 없겠지만 '히어로' 역시 다양한 함의를 풀어낼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염력'은 '부산행'이 그랬던 것처럼 장르적 소재에 단순하게 접근한다. 주인공의 초인적 능력은 냉혹하고 잔인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서민들이 꿈꾸는 한 줄기 희망을 상징한다. 주인공 석헌(류승룡 扮)의 능력은 그의 전처(이자 루미의 엄마)가 철거 용역에 의해 머리를 다쳐 죽어갈 때,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외계 운석에서 흘러나온 무언가가 약수에 흘러들어 주인공에게 이르고, 이 신묘한 능력은 그의 가족과 철거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재난으로서의 좀비는 단순 공포만 계속 유발해도 부여된 역할을 어느 정도 다할 수 있다. 나머지는 재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풀어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으로서의 히어로는 좀 다르다. 희망이기 때문에 더더욱, 막연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실제 용산 참사를 끌어와 일말의 희망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면 더더욱, 적절한 살이 붙어 현실화되어야 한다. 히어로의 초능력 역시 현실을 뛰어넘는 대단한 능력이라고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히어로의 정체성에 맞는 특수성은 물론, 능력에 적절한 제약을 주는 규칙들도 있어야 하고, 반작용으로서의 빌런도 필요하다. 능력의 획득 과정이 갑작스러울수록 이로 인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나 변모 과정은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염력'은 안일하다. '부산행'은 되던데 왜 이건 안되냐며 억지를 부린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으면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 척 메타포로 날아와 붙을 것이라 헛된 기대를 품는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부산행'은 딱히 대단한 조리가 필요 없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었다. 좀 낯설지만 별 고민 없이 내어 놓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잘 먹는, 그런 음식. 하지만 '염력'은 낯설 뿐만 아니라 세심한 조리까지 필요한 재료를 택했다. 하지만 이 실력 없는 요리사는 이전과 다른 재료를 같은 방식으로 툭 접시에 내어놓는다. 이건 실력에 앞서 성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비교 대상의 문제도 있다. 최근 몇 년 간 히어로 영화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져 안일한 접근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게 됐다)





아버지든, 히어로든, 망한 캐릭터


비현실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재난 상황을 연출해 한국 사회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부산행'은 '괴물'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인물로 보자면 '염력' 역시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염력'의 석헌은 능력도 벌이도 시원찮은 무능한 아빠라는 점에서 '괴물'의 강두(송강호 扮)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두 인물은 질적으로 다르다. 강두는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석헌은 그렇지 않다. 강두는 한강 둔치의 매점에서 빈둥거리는 가장이지만 부성애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아빠다. 이 부정(父情)이 인물과 이야기를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석헌 역시 무능력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지만, 딱히 부정이랄 게 없는 인물이다. 그는 빚에 못 이겨 집을 나간 후 가족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가장인데다, 꼴보기 싫은 아저씨이기까지 하다. 철거를 둘러싼 사태에서 그는 철저히 외부자 입장인데, 방관적 태도를 취하던 석헌이 갑자기 영웅 심리에 사로잡히는 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히어로의 이야기 모두에서 실패하는 요인이 된다.


영화는 밉상 캐릭터가 초인적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전복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초능력은 아예 종이컵, 담배꽁초, 편의점 의자, 라이터, 쓰레기 더미 등 온갖 비루한 것들을 소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딱히  전복적인 상징처럼 보이지도 않는 데다, 그리 웃기지도 않는다. (딸 앞에서 넥타이를 코브라처럼 부리는 대목에 이르면, 유치한 상징에 실소가 터지긴 한다) 그러다 뜬금없는 각성 이후부터는 대단한 영웅 행세를 한다. 이쯤 되면 '비루하고 비겁한 캐릭터는 초반 설정일 뿐이고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게 히어로는 히어로니까 그렇게 생각해달라'고 영화가 관객에게 애걸하는 꼴이 된다. 홍 상무(정유미 扮)의 입을 빌려 '한국형 히어로'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는 장면에 이르면 안쓰러운 마음까지 든다. (자가 정의를 통해 지나치게 노골적인 의도를 비틀고 희석시킨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액션 시퀀스도 실망스럽다. 최근 한국 영화들의 기술적 진보를 간단히 비웃어 버리는 어설픈 CG는 말할 것도 없고, 히어로의 능력치 조율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넝마와 고물들이나 겨우 움직이던 주인공이 적들에게 흡사 장풍 같은 염동력을 발휘하더니 아예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도로 위를 마구 뛰어다니며 차량을 밀어내는가 하면, 고층 빌딩에 매달리기도 한다.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주인공처럼, 연출 역시 어떤 능력을 줘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한다. 그러다 어디서 본 각종 히어로 영화와 캐릭터의 액션 시퀀스를 마구 끌어다 쓴다. (손짓으로 차를 구겨 버리는 '크로니클'의 앤드류, 빌딩 옆면을 붙잡고 뛰어다니는 헐크, 이중 삼중으로 덮쳐 오는 적을 회피하는 '매트릭스2'의 네오 등) 창피와 염치를 모르는 아재 주인공처럼 말이다.


악당 역시 별 매력이 없다.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홍 상무는 악역이라기보다는 악의 대리인 같은 느낌이다. 물론 반드시 빌런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제일 무서운 것은 감춰진 존재일 수도 있고, 얼굴 없는 타인들일 수도 있고, 거대한 세상 자체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연상호 감독 역시 '진짜 빌런은 보이지 않는 체제'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리인 뒤에 감춘다고 해서 악이 작동하는 원리가 저절로 그럴듯해지진 않는다. '염력'의 '보이지 않는' 빌런은 얼굴만 없을 뿐 세상에서 가장 단순무식한 악당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멍청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연상호 감독은 용산 참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깊지 않음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남는 건 황당무계함


영화는 스스로를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만든다. 이 사회적 갈등 한가운데 쿵 떨어진 히어로는 전복의 쾌감을 주기보다는, '이 불행이 황당한 상상으로나 구제될 수 있는 일'이라는 무력감을 부추긴다. 과연 용산 참사에 이런 히어로가 한 명 있었다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었을까. 주인공의 어설픈 개입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석헌이 무력시위 끝에 딸을 구하고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건설사를 무너뜨린 것은 정의가 아니라 시장의 논리였다.


철거민들은 영화의 결말에서처럼 다시 희망을 갖고 염력으로 전해 받은 생맥주 잔을 들 수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염력'은 개봉 당시 다큐멘터리 '공동정범'과 함께 상영됐다. 용산 참사에 연루되어 감옥에 다녀온 철거민들 중 다수가 새로운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의 황당무계함은 그들의 삶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제3자인 관객에게도 불편한 시선일 뿐이다.


현실의 비극을 소재로만 활용한 것은 분명 지탄받아 마땅하다. '염력'을 어디까지나 서민 영웅을 차용한 사회 풍자 코미디 정도로 볼 수도 있다. 좀 비현실적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런 시각에 대해서는 아마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뉴스에 나와 모두 북한 소행이라 주장하는 전문가를 보고 루미가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거 보지 마세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불편한 히어로, 게으른 이야기, 안일한 희망만으로 그린 우화. 변비라도 걸린 것 같은 표정으로 용을 쓰며 염력을 쥐어짜는 주인공의 모습은, 곧 '염력'의 자화상이다.





부산행 속편이 나온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 속편으로 '반도(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전편에서 최후의 보루로 남은 부산까지 바이러스가 퍼지는 이야기를 담는다고 한다. 달리는 열차라는 제약 속에서 탄생한 '부산행'과 달리 좀비들을 도시에 풀어놓고도 성공을 재현할 수 있을까? 혹시 제목에서 유추되는 대로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섬 아닌 섬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 대해 다룬다면, 사회 진단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솔직히 '염력'만 봐서는 좀 회의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논 - 투명사회의 역설, 설정만 남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