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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17. 2018

아논 - 투명사회의 역설, 설정만 남았다

Anon, 2018



‘아논’은 모든 정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신원을 감춘 익명의 존재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다룬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SF들이 그렇듯 설정은 꽤 참신하다. 주인공 살(클라이브 오웬 扮)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영상 인식을 통해 데이터화된다. 모든 사람의 신원, 모든 상품의 정보, 온갖 광고까지 수많은 정보가 증강현실의 형태로 밀려 들어온다. 그뿐이 아니다. 모든 시각 정보가 녹화되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영상으로 저장되기까지 한다. 이로써 완벽한 투명사회가 구현된다. 영화 속 세상에서는 누구도 익명 뒤에 숨을 수 없고, 누구도 남 모르는 비밀을 가질 수 없다.


‘아논’ 속 세상은 현재 인류가 지향하는 첨단 기술의 궁극으로 보인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 어떤 정보라도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통화, 채팅, 결제, 내비게이션 등 현재는 스마트폰에 있는 기능들이 눈 한 번 깜박이는 것으로 가능하게 된다. 모든 일이 기록으로 남으니 범죄는 벌어질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인류가 꿈꾸던 세상이 아니다. 최고의 투명사회는 곧 최고의 감시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망각 없이 모든 기억을 소유하지만 동시에 어떤 기억도 자기 것이 아니게 된 사람들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피폐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설정 이상의 무엇도 더 보여주지 못한다. 앤드류 니콜 감독은 전작 ‘가타카’를 기대했을 사람들에게 ‘인 타임’보다도 못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최소한의 장치로 미래 사회를 표현해낸 점은 전작들과 유사하지만, ‘아논’에는 사실 아예 이렇다 할 볼거리가 전무하다. 이야기 역시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개는 지지부진하고 결말은 갑작스럽다. 메시지 역시 기술의 역설로 망가진 디스토피아 이상의 무엇을 전달하지 못한다. 투명사회에 대한 위협이라던 여자 주인공이 선도 악도 아닌 위치에서 영화 내내 의문만 키우다 퇴장하는 탓이다. 결국 영화는 '비밀이 있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게 없는 것’이라는 투명성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명제로 어렵게 돌아온다.


‘anon’은 ‘anonymous'의 약자다. 이 단어에는 ‘익명의'라는 뜻도 있지만 ‘특색 없는’이라는 뜻도 함께 갖는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다. ‘익명’을 소재로 하고 있는 ‘특색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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