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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15. 2018

서버비콘 - 미국 사회의 추악한 민낯

Suburbicon, 2017

※ 영화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버비콘'은 1950년대 서버비콘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이면을 들춰낸다. 지극히 미국적인 일러스트의 TV 광고를 통해 소개되는 서버비콘은 모든 인프라가 완비된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광고들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나면, 그 안에 악취 가득한 진실들이 숨어있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 축으로 흘러간다. 백인 마을에 이사 온 흑인 마이어스 가족과 주민들 간의 갈등, 그리고 아내를 죽이고 처제와 보험금을 챙겨 달아나려는 가드너(맷 데이먼 扮)를 둘러싼 사건사고들이 병렬로 진행된다. 


백인 주민들은 마을에 흑인 가족이 이사 오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시작된 배척은 집 앞 시위로 번지고, 낯선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배타심은 점차 고조되어 비정상적인 증오가 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신의 이름과 가족의 가치를 빌려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내건 기치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추악한 것인지 바로 옆집인 로지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불한당 두 명이 집 안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가드너의 아내 로즈(줄리안 무어 扮)를 살해한다. 하지만 가드너와 로즈의 쌍둥이 동생 마가렛(줄리안 무어 扮)은 이내 차분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건 불륜 관계인 가드너와 마가렛이 로즈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니 그 소중하다던 가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추악한 이면이 드러난다. 



영화는 일련의 사건을 아이의 시선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한다. 가드너의 어린 아들 니키(노아 주프 扮)에게 어른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곳이다. 눈 앞에서 목격한 어머니의 죽음에도 아버지는 침착하기만 하다. 심지어 범인식별절차(police lineup)에서는 범인이 분명한 용의자들을 모른 척 하기까지 한다. 함께 살던 마가렛 이모는 어머니가 죽고 난 후에도 집에 함께 산다. 아예 어머니처럼 금발로 염색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엄마 행세를 한다. 급기야 니키는 아버지와 이모의 변태적인 정사를 목격하기에 이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막장으로 치닫는다. 돈을 뜯어내러 온 보험조사원(오스카 아이삭 扮)을 마가렛이 독살하고, 그녀는 청부살인 대가를 받아내려는 건달에게 교살 당한다. 그리고 그 건달은 니키의 전화를 받고 온 미치 삼촌의 총에 맞아 죽는, 물고 물리는 관계가 연출된다. 그 사이 도망치는 보험조사원을 쫓아가 살해, 유기한 가드너가 모두 죽고 아들 닉키만 남은 집으로 돌아온다. 이 극단의 폭력이 자행되는 동안 옆집에서는 주민들의 폭동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며 사람들의 광기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겉과 속이 모두 썩은 미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밖에서는 인종차별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안에서는 백인들이 탐욕에 빠져 서로 죽고 죽이고 있는 모습을 미국의 축소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모와 바람이 나 엄마를 죽인 것도 모자라 온 가족을 죽게 만든 아버지는, 이건 없었던 일이라며 새로 시작하자고, 아니면 널 죽이겠다고 어린 아들을 협박한다. 온몸에 피가 튄 채로 독이 든 샌드위치와 우유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면서 말이다. (7대 죄악 중 하나가 식탐이라는 게 새삼 떠올랐다) 영화는 온갖 추악한 과거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정작 자기가 삼킨 게 음식인지 독인지도 모르면서 잘 포장된 장밋빛 미래를 믿으라고만 강요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곧 미국 가족주의의 민낯이자 아메리칸드림의 실체라고 조롱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도식적이다.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니키는 죽은 아버지를 옆에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TV를 보고 있다. 그리고 뒷마당으로 가 옆집 아이와 캐치볼을 한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등 십계명이 금하고 있는 대부분의 율법을 어긴 어른들은 모두 죽고, 아이들만 남아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실천한다.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캐치볼을 하는 이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미국의 다음 세대들은 이전 세대의 광기를 모른 척 옆에 두고 불완전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 결말은 그럴듯하지만 좀 성급해 보인다. 반드시 사건이 수습될 필요는 없지만, 지나치게 서둘러 마무리하는 바람에 모든 게 소동에 그치고 만다. 물론 현시대의 번영과 평화 역시 성급하게 포장된 결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취하는 느슨한 결론이 이를 은유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버비콘에서 자행된 인종차별이 어떤 국면으로 흘러갈지, 관객은 알 수 없게 됐다. 가장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가 소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마치 가드너가 남은 가족에게 계속 아루바섬으로 도망가자고 제안하는 것처럼, 영화는 계속 편리한 국면으로 도망친다. 스릴러나 블랙코미디, 어느 쪽으로도 이야기 전개가 뛰어나지 않다. 가드너가 시체를 유기하고 아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처럼(물론 이 신은 블랙코미디로서는 굉장히 훌륭했지만), 이야기가 맞지 않는 탈것에 실려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감독 조지 클루니가 초기에 선보였던 작품들을 감안하면, '서버비콘'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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