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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28. 2018

물괴(2018) - 누더기처럼 기워진 괴물


'물괴'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과 결정권을 쥐여주면 어떤 끔찍한 일이 생기는지 보여주는 '재난'과도 같은 영화다. '조선판 괴물'이라는 지향점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라 그 뻔뻔함을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의 복제 의지조차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다. 물괴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물론, 물괴가 등장하는 핵심 장면에서도, 차라리 대놓고 영화 하나를 가져다 베꼈으면 이보다 나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연기보다 연출이 더 문제


우선 연출의 문제가 심각하다. '물괴'에 대한 혹평을 살펴보면 보통 배우의 연기 문제를 가장 먼저 지적한다. 국내 관객들의 평가가 상당 부분 배우의 매력에 좌우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연기가 극의 핍진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괴수물을 사극과 결합해 더 낯설게 만들었으니,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게 영화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그런데 배우의 대사 처리부터 어색하니 영화 속 비현실의 세계에 집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역사 속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영화는 물괴가 실록에 적혀 있다고 반복해서 강조할 뿐 그럴듯한 기원을 제시하지 못한다. 폐주 연산이 동물 실험을 하다 만든 게 물괴라니... 영원히 고통받는 연산군)


분명 특정 배우의 연기력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건 배우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연기에 대한 디렉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연기를 잘하던 배우들마저 톤이 안 맞아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 감독의 직무 유기가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김명민이 맡은 주인공은 어설픈 코미디까지 하느라 '불멸의 이순신'과 '조선명탐정' 사이를 헤맨다. 김인권은 기존의 코믹 이미지로만 허비되고, 최우식은 사건을 전달하는 역할로만 소비된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는 이혜리의 경우는 '응답하라 1988'의 '덕선'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연출의 패착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철없는 딸 정도가 맞는 옷인 배우에게 궁수, 검시관, 다모 등 수많은 역할을 맡기고 되지도 않는 로맨스까지 얹으니 캐릭터도 배우도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괴물'로 치면 고아성과 배두나의 역할을 동시에 맡기고, 사건 수사와 로맨스까지 얹어준 셈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업영화의 배우는 좀 부족할 수도 있다. 연기력 만큼이나 인지도도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배우들을 끌고 결과물을 내는 건 온전히 감독의 몫이다. '관상'이 사극 연기력이 다소 부족했던 이종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물괴'의 배우들은 자기가 어느 감정선쯤을 지나고 있는지 모르고 카메라 앞에 선 기색이 역력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크로마 키 촬영 중 시선 처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마저 보인다. 오로지 극을 다음 예정된 장면으로 진행시키는 데 급급한 대사들도 너무 많다. 내막을 알 순 없지만 '물괴'는 각본 단계, 촬영 현장에서부터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던 셈이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봤어


조선 배경의 괴수물이 기본이지만, '물괴'는 전형적인 한국식 뷔페 영화들의 패착을 답습한다. 공포, 서스펜스, 액션, 코미디, 로맨스까지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절대 장르 얘기가 아니다. 이 영화에 장르 문법을 논하는 건 사치다) 그 결과 어느 하나 성공적이지 않은 데다 산만하기까지 한 괴작이 되고 말았다.


'물괴'는 괴수물의 클리셰를 차근차근 쌓아올린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공포감을 키우다, 물괴의 은신처에서 들키지 않으려 숨죽이는 장면에, 무섭게 쫓아오는 물괴를 피해 달아나는 추격 신을 좀 넣고, 물괴가 조선의 상징적인 랜드마크를 부수기까지 한다. 현대 배경이었다면 마천루와 갖가지 랜드마크를 부수었겠지만, 조선 시대인 관계로 근정전의 용상을 부수고 광화문 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만족한다. 수많은 할리우드 SF에서 백악관과 링컨 동상을 부수던 장면을 조선식으로 치환한 셈이다. 유치하긴 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물괴에만 집중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괴수물의 뼈대에 갖가지 요소를 잔망스럽게 끼얹는다. 악랄한 권력자에 의한 역모는 조선 시대 배경에 항상 딸려 오는 소재니까 별 고민 없이 메인 플롯 자리에 집어넣는다. 양념이 필요하니 느닷없이 개그와 로맨스도 추가. 대자본이 투입된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종합선물세트 강박증'이 '물괴'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문제는 이것들이 딱히 재미도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것저것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재료를 넣어 잡탕식으로 섞고 나니,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단 한순간도 정상이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와 이야기도 문제지만, 최소한의 개연성도 갖추지 못한 전개 때문에 '물괴'는 러닝타임 내내 갈팡질팡한다. 관객을 제일 헷갈리게 하는 건, 물괴가 진짜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 없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초반 전개다. 정치적 음모와 괴물로 인한 재난이 만든 각각의 구도가 제대로 엮이지 않은 탓에 영화는 목적지를 잃고 헤맨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동일한 구도를 조선 배경으로 가져다 놓기만 했지, 세계관은 얄팍하고 상상력은 빈곤한 탓이기도 하다.


개연성의 측면으로 가면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엑스트라까지 포함)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영화는 정말 흔치 않다. 왕이 굳이 전직 내금위장을 친히 찾아오는 장면 정도는 애교다. 몇 가지만 예시로 들어도 아래 정도다.


물괴가 나타난다는 한양에 딸을 데려와 현장 검시관 역할까지 시키더니,막상 수색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막아선다.


별 필요도 없어 보이는 백성들을 물괴 수색 명목으로 강제 징집한다. 후반부 백성들이 봉기하는 전개를 위한 억지 설정이다. 거기에 영의정 수하의 사병까지 도성 안으로 합류해 머릿수를 늘린다. 물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역병 걸린 시체를 먹고 자란 물괴에게 물리면 수포 투성이가 되어 죽는데,전염 가능한 그 시체에 모두가 아무렇지 다가선다. 심지어 왕까지.


착호갑사가 영의정의 사병 행세를 하는 설정도 황당하지만, 이미 무소불위 상태인 그들이 왜 굳이 백성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미 엄청난 위세의 군사들인데 그대로 궁을 점거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착호갑사의 등장은 대놓고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신을 베껴 헛웃음을 유발한다. 차라리 호랑이 잡는 사냥꾼에 가까웠던 착호갑사들을 전면에 내세워 물괴에 맞서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극중 새끼 시절 물괴를 키웠던 '송할배'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저 물괴의 전사(前事)와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소비되는 역할이다. 본 적도 없는 거대 물괴에 대해 줄줄 읊다가 별 개연성도 없이 '괴물'의 강두 아버지(변희봉 扮) 같은 표정과 손짓을 하며 자신을 희생한다. (하다못해 이런 장면도 쓸데없이 베껴왔다)


도성 안이 불바다인데 백성들은 임금 옆에 있으면 죽이진 않을 거라며 광화문으로 모인다. 횃불 시위라도 하려는 걸까.


물괴와 한바탕 싸움이 끝나자 백성들은 별 동인도 없이 궁 안으로 모여든다. 궁이 이렇게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던가.


물괴에게 죽기 직전 악당 영의정은 '넌 내가 만든 허상이야' 같은 헛소리를 시전한다. 뭘 의도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헛소리에도 최소한의 앞뒤는 필요하다.


이 예시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물괴'는 제정신인 장면을 찾는 게 더 어려운 영화다. 하다못해 물괴의 동선도 납득이 가지 않으니 말이다. 왜 여기저기 쫓아가서 사람들을 살육하는지, 허기인지 분노인지 살의인지 동인이 분명치 않다. 괴물은 원래 비합리적이라고 하기엔, 영화가 필요로 하는 장소에는 꼬박꼬박 나타나 잘 보이지도 않는다는 눈으로 잘도 죽이고 다닌다.



이 모든 게 감독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물괴'의 연출은 확실히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에, 자의보다는 타의가 더 작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한참을 투자자와 제작자들을 소개하는 데 할애한다. 영화가 끝나고도 감독 이름보다 앞서 태원 엔터테인먼트 로고가 뜬다. 뭐가 문제였는지 알 만한 대목이다. 제작 전부터 삐걱거리던 '물괴'는 누가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게 여기저기 누더기처럼 기워진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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