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Beats Per Minute, 2017
삶은 투쟁이다. 누구든 그렇다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은 누구에게나 명백히 투쟁이다. 하물며 약자, 소수자의 삶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거대하고 냉혹한 세상에서 그들은 항상 무언가에 맞서야 한다. '120BPM'에 등장하는 '액트업 파리'의 회원들의 투쟁은 더욱 치열하다. 그들은 세상의 시선에도 맞서야 하고, 시한부 인생을 살기에 시간으로부터도 쫓긴다.
'120BPM'은 에이즈 감염인 권리 보장 운동을 하는 행동 단체인 '액트업 파리'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액트업 파리'의 활동가였던 로빈 캉필로 감독은 이 민감한 이야기에 관객을 깊숙이 참여시킨다. 특히 카메라는 단체의 활동과 인물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틈바구니로 관객을 안내한다.
하지만 영화가 이들을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120BPM'의 카메라는 시점 숏을 통해 시위대 속으로 섞이는가 하면, 모임에서 설명을 듣거나 관찰하는 입장을 교차해 제시함으로써 객관성을 견지한다. 시위부터 캠페인까지 전방위로 이루어진 '액트업 파리'의 활동을,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바라본다. 이들의 절박함에 공감하다가도, 과격한 주장과 행동에 한발 물러서기도 하며, 종국에는 관객 개개인의 마음속 편견과 마주하게 한다.
'액트업 파리'의 화살은 주로 제약회사와 정부를 향한다.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며 약물 치료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있는 이들에게 신약 개발에 거의 성공하고도 공개하지 않는 제약회사는 목숨을 볼모로 잡고 있는 '살인자'처럼 비친다. 해마다 감염자가 늘어나지만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 맞서 '액트업 파리'는 정부 기구 행사의 연단을 점거하고 제약회사에 잠입하는 등 게릴라 시위를 벌인다.
이들이 제약회사 곳곳에 혈액 팩(가짜 피)을 던지는 신에 이르면 관객은 어떤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삶과 그 일상이 얼마나 비참할지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개인의 선택이나 행동에 따른 질병에 대해 국가나 기업이 책임을 져야 되는가' 등 갖가지 반발 심리가 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120BPM'에 대한 당연하고도 옳은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정확히 영화가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액트업 파리'의 활동은 단순히 성소수자 인권 운동만이 아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에이즈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시대였고,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예방법을 몰라 무차별적으로 감염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이 사실을 외면하기만 했다. 마치 모든 원인이 성소수자들의 성적 일탈에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고 국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동안 성소수자들은 근거 없는 낭설들로 인해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기도 했다.
'액트업 파리'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맞서는 투쟁임과 동시에 주사기 재사용 금지, 교내 에이즈 예방교육 등 국가 시스템이 질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촉구하는 운동이었다. 영리 추구에만 혈안이 된 제약회사들에게 공적 역할을 요구하는 사회 운동이기도 했다. 그들의 폭력적인 방식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주장은 개인이 사회에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에이즈가 과연 감염자 혼자 감내해야 할, 개인의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개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영화는 관객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외부의 시선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보통은 감정 이입을 돕기 위해서라도 주요 인물들의 입장을 옹호하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악인으로 일반화되기 일쑤다. 하지만 '120BPM'은 어느 집단도 전형화하여 다루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교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콘돔 자판기 설치를 요구하고 에이즈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을 보자. 수업 중이던 학생들 대다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들이 나눠주는 원색적인 전단을 들여다본다. 그 가운데 마치 동경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감화된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기는 동성애자가 아니라며 전단을 뿌리치는 학생도 있다. 이들을 저지하고 항의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으라며 교실에서 설명을 할 수 있게 허락하는 교사도 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복잡하게 생겼다.
동성애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나 혐오는 결국 극단적인 결론만 낳을 뿐이다. 다른 어떤 문제든 마찬가지다. 어떤 삶도 양극단에 선 자들에 의해 재단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시위 방식부터 사소한 슬로건까지 모든 활동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액트업 파리' 회원들의 모습을 빠짐없이 다룬다. 이 치열한 투쟁이 바로 삶 자체라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이다.
수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확인할 수 있는 건 세상이 매우 단단하다는 사실뿐이다. 사람들의 편견은 단단하고,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병색이 점점 짙어질수록 이들의 활동도 점점 더 전투적으로 변한다. 점점 더 죽어갈수록, 점점 더 격렬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역설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심장은 보통 1분에 60~100회 뛴다. 심장이 1분에 120번 뛴다면, 그건 매우 흥분하거나, 매우 절박한 상태임이 틀림없다. 빠른 심장박동은 환희나 성적 흥분이 될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이런 역설을 1980년대 당시 '액트업 파리' 회원들에게도 인기였던 120BPM의 하우스 음악으로 담아낸다. 독자적인 장르가 된 지금은 128BPM에 맞춰져 있지만, 1980년대에 디스코에서 막 갈라져 나온 초기의 하우스 음악은 120BPM이 기준이었다. 인간은 1초에 두 번 울리는 120BPM의 템포를 본능적으로 좋아한다고 한다. (1960~90년대 유행한 음악 74,000곡을 조사한 결과 120 BPM의 템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말하자면, 영화에 사용된 지미 서머빌의 하우스 음악은 삶과 죽음의 극단을 교차하는 박동임과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음악인 셈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역설을 담아낸,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주인공들이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하우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션(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扮)은 모든 걸 잊은 표정이다. 이 순간만큼은 외부의 모든 편견,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음악에 빠져 춤을 추는 사람들 모두 현재의 삶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삶이 가장 격정적으로 빛나는 순간, 카메라는 사람들 위로 부유하는 먼지들로 시선을 옮긴다. 마치 빛나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듯, 거대한 세상 아래에서 춤추는 우리들 모두 티끌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현미경처럼 극단적으로 당겨진 카메라는 먼지들 사이에 자리한 HIV 바이러스를 포착한다. 감염자 모두를 죽음으로 끌고 가고 있는 바로 그 바이러스다. 이렇게 삶과 죽음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신약 스터디 모임에서 제레미가 갑자기 쓰러지는 장면부터 시선을 서서히 죽음으로 옮긴다. 죽음은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왜 에이즈에 걸렸는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죽음은 의학 용어들처럼 낯설다. 세상을 향했던 투쟁은 점점 죽음과 맞서는 투쟁으로 변모한다.
치료법을 찾고 게이 퍼레이드를 준비하며, '액트업 파리'의 회원들은 숨 가쁘게 움직인다. 그럴수록 生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의 절박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120BPM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남들보다 더 빨리 살고 있는 것이고, 동시에 남들보다 더 빨리 죽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래서 영화 속 슬로모션 장면들은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간을 필사적으로 늦춰 보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게이 퍼레이드의 역동감 넘치는 치어리딩과 날리는 꽃가루를 슬로모션으로 담아낸 신은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을 찰나의 순간에 담아낸 장면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죽음에 맞서는 투쟁은 죽음을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제레미가 죽자 '액트업 파리'는 그의 사진으로 피켓을 만들어 시위를 한다. 그리고 역사 학도였던 제레미의 내레이션으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해 얘기한다. 당시의 시위대는 총에 맞아 죽은 주검을 카트에 싣고 행진했고 이것이 군주제 폐지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며, '액트업 파리'의 시위가 곧 나의 정치 장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 액트업 파리의 시위 장면도 함께 섞인다. 영화는 자유주의의 역사와 실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역사를 한데 엮어낸다. 세상의 시선에 맞서는 투쟁과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션의 상황은 더 처절하다. 와병과 죽음을 전시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세상은 내가 더 아프길 바라는 것만 같고,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영화는 한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투쟁이자 저항이라고 웅변하는 것처럼, 절대 고개를 돌려 외면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상황 역시 외면하지 않는다. 앙상한 몸, 핏기 없는 얼굴, 초점 잃은 눈동자를 직시한다. 육체와의 고단한 투쟁을 마친 투사와도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生의 불꽃이 꺼진 후에도 투쟁은 계속된다.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에 옷을 입히고, 친구들은 집으로 찾아와 션의 유지대로 이후의 투쟁을 준비한다. 삶도 죽음도 어쩌면 끝나지 않는 투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죽기 전 션은 온통 핏빛인 센 강 꿈을 꾼다. 개인의 죽음이 곧 전체의 죽음이 되는 순간이다. '120BPM'은 션이라는 활동가이자 에이즈 환자의 삶과 죽음을 담은 일대기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션의 정치 장례로 끝을 맺는다. '액트업 파리' 회원들은 숀의 유골을 던지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점멸하는 불빛 아래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춤을 추는 이들이 빠르게 교차 편집된다. 이 마지막 시퀀스에는 지금까지 영화 속 삶을 규정하던 모든 것들이 공존한다. 저항, 시위, 절박한 외침으로 증명되는 역동적인 삶이 있고, 하우스 음악, 춤, 반짝이는 조명, 부유하는 먼지 아래 명멸하는 삶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심장박동 같은 몇 번의 비트를 끝으로 암전. 엔딩 자막이 오르는 동안은 음악 하나 없이 정적만 남는다. (액트업의 모토가 'SILENCE = DEATH'임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죽음이 예고된 삶은 오히려 더 뜨겁다. 주인공들의 뜨거운 삶은 외려 우리의 삶이 비겁한 것은 아닌지 되묻게 한다. 우리는 종종 뒤에 숨고 편을 가른다. 나와 다른 것을 혐오하고 배척함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120BPM'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퀴어 영화의 범주를 넘어 보편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 역시 우리를 조롱하는 이들과 매일 마주한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내가 믿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그저 나인 것, 그 모두를 조롱하지 못해 안달 난 이들과 뒤섞여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멸시 섞인 시선에 션과 나톤처럼 키스로 응수할 수 있을까? 나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끄럼 없이 내세워 대항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삶은 타자와의 싸움이자 투쟁이다. 그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있다면, 엔딩 크레딧의 검은 적막이 그러한 것처럼, 이미 죽어있는 삶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