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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21. 2018

몬태나 - 용서, 화해가 아닌 속죄, 구원의 여정

Hostiles, 2017


※ 영화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개척시대 한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남편은 장작을 패고 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영화는 출발한다. 일가족이 몰살되는 데,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데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약탈자 코만치족들이 괴성과 함께 떠나고, 첫 쇼트 한가운데 있던 집은 그 자리에서 덩그러니 불타고 있다.


제목 타이틀 이후의 상황은 180도 다르다. 군인들이 도망간 아파치족 가족을 잡아오고 있다. 주인공 조셉 대위(크리스찬 베일 扮)는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조셉은 평생을 원주민과 싸워 온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에게 잔인하게 동료들을 잃었고, 자신도 잔혹하게 원주민을 학살해왔다. 그는 원주민의 야만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사람임과 동시에 자신이 야만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일생일대의 적이었던 옐로우 호크 추장을 몬태나까지 호송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조셉 대위는 원치 않는 짐을 지고 가는 길에 영화 첫 신의 일가족 몰살 현장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는 가족을 모두 잃고 실성한 로잘리(로자먼드 파이크 扮)가 있다. 그녀에게 원주민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 그녀가 이 여정을 함께 하게 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용서와 화해의 서사를 시작한다.


이 호송길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해와 화해의 여정이 될 것인지, 파국으로 치닫는 여정이 될 것인지에 따라 영화가 향하는 목적지도 정해질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조셉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콧 쿠퍼 감독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이끌어 내기보다는, 상징적인 주변 인물들을 통해 주인공 스스로 과거를 되짚게 만든다.


인디언 일가를 살해해 군사 재판을 받게 된 찰스 병장(벤 포스터 扮)은 조셉의 과거, 그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이었던 과거를 상징한다. 과거의 대립 구도에 갇혀 있는 인물로, 그에게 원주민은 몰살시켜야 할 적일 뿐이다. 그는 치열했던 운디드 니 전투에서 조셉의 휘하로 싸웠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그는 운디드 니 전투부터 조셉을 따라온 망령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셉이 얼마나 야만적인 존재였는지 일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I don't know how you done it all these years, Captain. Seeing all the things you've seen. Doing all the things you've done. Makes you feel inhuman after a while."
"You just gotta take your dues."
"Suppose I will."
"But if it's just you and me talking, we both know it could just as easily be you sitting here in these chains."
"But I was just doing my job."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다 감당하셨을까. 온갖 볼 것 다 보고, 온갖 할 짓 다 하고, 어느 날 자기가 사람인지도 모르게 될 텐데."
"제 몫의 대가만 치르면 돼."
"그래야겠죠."
"그런데 우리 둘끼리 얘기지만, 여기 묶여있는 사람이 대위님이 됐을 수도 있죠."
"난 임무를 수행한 것이네."


당신이나 나나 다르지 않다는 찰스 병장의 말에, 조셉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여자와 아이를 가리지 않았던 과거의 살육은 과연 군인의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짐승의 일이었을까. 사실 조셉 역시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기 몫의 대가만 치르면 된다'는 대답은 병사와 자신에게 동시에 하는 말인 셈이다.


조셉의 부하이자 전우인 토마스 상사(로리 코크레인 扮)는 조셉의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다. 평생을 원주민과의 전쟁에 바쳤지만 그에게 남은 건 우울증 뿐이다. 군인을 하겠다고 한 이상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니까, 그 일을 안 하면 시체가 될 일 밖에 남지 않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걷고 기는 건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다 죽여왔다고 고백한다. 자꾸 하다 보면 살인 역시 대수롭지 않고 익숙해지는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을 잃는 것 (losing men). 그와 조셉은 수많은 전우를 잃었고, 자신의 인간성 또한 잃었다. 옐로우 호크 추장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용서를 구한 토마스 상사는 달아난 찰스 병장을 쫓아가 사살한 후 자결한다. 말하자면, 죄의식이 야만의 망령을 없애고 함께 죽은 것이다.



영화 초반 조셉 대위는 원주민과 치열하게 싸우던 때가 좋은 시절, 인생의 절정기였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것은 그가 살육을 즐기는 악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가 모든 게 명확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빼앗기면 그만큼 다시 빼앗아 오면 되는 동태복수(同態復讐)의 시대는 무자비했지만 그만큼 단순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조셉의 양심은 편안했다. 토마스 상사는 조셉이 원주민의 창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을 때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고 회상한다. 아직 덜 자란 아이의 세계는 내 편, 아니면 적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그에게 주어진 원주민 호송 임무가 그렇듯 단순한 이분법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원주민에게 도륙 당한 가족을 제 손으로 묻은 로잘리가 아파치족 여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마주한 조셉은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님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늙었고, 지나온 시간은 과거가 되었다. 이 과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의 남은 삶이 결정될 것이다.


개척민과 원주민, 누구의 입장과 논리가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잔인하게 서로 죽고 죽였다. 로잘리가 그랬듯이, 가족의 시체를 묻기 위해 맨손으로 땅을 파야 했다. 그렇게 피가 묻고 피멍이 든 손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미합중국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살인자와 피해자가 뒤엉킨 땅에서 중요한 건, 결국 어떻게 살인하고 승리하고 쟁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일지 모른다고 얘기한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내 사람을 잃는 것이기에, 가족을 보호해야 하고, 나아가 아군과 적을 모두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내 안에 남은 일말의 '사람'다움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Los Angeles Times는 '몬태나'를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도덕적 생존에 관한 드라마'라 평하기도 했다) 원주민에게 가족과 모든 것을 빼앗긴 로잘리와 평생의 숙적 옐로우 호크 추장을 모두 보호해야 하는 조셉의 여정은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 지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사실 조셉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옐로우 호크 추장이다. 암으로 죽어가던 추장이 눈을 감기 전 조셉은 원주민 말로 이렇게 말한다. '뒤돌아보지 마시오, 친구. 좋은 데로 가시오. 나의 일부도 당신과 함께 죽소.'라고. 결국 평생의 적 역시 야만의 길을 함께 걸었던 불행한 동행자였을 뿐이다. 코만치족과 사냥꾼들의 습격에 맞서 함께 싸운 1,000 마일의 여정은, 결국 바깥의 적들(hostiles)이 아니라 내 안의 적의(hostility)가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어쩌면 적들은 이미 서로 용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주인공이 외적 갈등을 통해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자기 안의 인간성과 야만성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게 하는데 주력한다. 추장에 대한 조셉의 반감은 여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서정의 측면에서 보면, 서부를 시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촬영과 배우의 탁월한 연기에 힘입어 영화 전반에서 절제미가 느껴진다. 하지만 서사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후회하고 있는 자, 이미 용서한 자들의 이야기는 그리 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인물들이 이미 다 용서를 해버리고 나니 관객의 정서를 위한 몫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다. 조셉 외의 인물들이 모두 그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죽어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관객의 감정은 쉽게 고양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화 '몬태나'는 용서나 화해가 아니라 속죄나 구원의 여정에 가깝다. 우여곡절 끝에 몬태나에 도착하지만 땅 주인과의 싸움 끝에 모두가 죽고 조셉, 로잘리, 그리고 인디언 아이만 남는다. 인디언 아이와 함께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나는 마지막 장면은 다소 안일한 결말로 보인다. 모두 다 죽고 난 뒤의 평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정말 모든 갈등들이 봉합되긴 한 것일까? 육중한 증기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이게 미국의 역사라는 것처럼. 하지만 이 기차가 제대로 목적지까지 달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시 열차 강도나 원주민의 습격을 받진 않았을까? '몬태나'는 조셉의 영혼을 통해 미국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첫 자막에서 인용된 D. H. 로렌스의 문장처럼 말이다. 문장에 적힌 그대로, 아직 그 영혼 속의 살의와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트럼프 시대에는 더더욱.


The essential American soul is hard, isolate, stoic, and a killer. It has never yet melted.
미국 영혼의 본질은 억세고 고독하고 초연하며 살의에 찼다. 그건 지금까지 그대로 뭉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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