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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Oct 03. 2018

세 번째 살인 - 진실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

三度目の殺人, 2017


* 이 글은 영화의 결말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일들을 보고 듣는다. 과거에는 TV 뉴스와 신문 기사로나 접했던 사건사고들이 이젠 온라인을 통해 24시간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소수의 입을 통해 전해졌던 소식들이 이제 모두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사연을 소비한다. 그 수많은 남 이야기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며, 동조하거나 비난한다. 하지만 그중 우리가 제대로 아는 사실은 얼마나 될까? 잘 알지도 못하는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는 다른 것이 된다. 참이냐 거짓이냐는 결국 이를 기억하고 진술하는 주체에 의해 각색되고, 다시 이를 검증하고 판단하는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을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실은 진실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자격의 문제인 건 아닐까? 진실을 판단할 자격은 과연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당사자일 수도 있고, 가장 정의롭고 공평한 사람, 혹은 가장 절박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구에게도 그런 자격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미스미(야쿠쇼 코지 扮)는 살인을 자백했다.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扮)는 그를 변호한다. 딱히 그를 믿는 것은 아니다. 감형 논리를 찾아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을 뿐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사건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진술이 번복되면서 모든 것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진실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재구성된다. 무엇이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지나치게 상냥하고 온순한 살인자 미스미의 모습은 처음부터 관객에게 혼란을 준다. 하지만 시게모리는 변호에 이해나 공감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야 어찌 됐든 변호 전략이 더 중요할 뿐이다. 살해 동기와 인과 관계에 따라 이야기, 그리고 미스미의 삶이 재조합된다. 변호의 유불리에 따라 강도 살인이 우발적 살인이 되고 후 공모 살인이 된다. 말을 바꿀 때마다 미스미는 점점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시게모리는 무엇이든 선택해 믿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린다.





물건을 훔친 시게모리의 딸 이야기는 전체 플롯의 축소판이다.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들킨 시게모리의 딸 유카는 변호사가 이럴 때 더 잘 통한다며 아버지를 부르고 거짓 눈물을 흘린다. 권위에 기대고 동정심을 유발해 만든 이야기는 진실이 무언지 헷갈리게 한다. 정도는 달라도 살인범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시게모리의 딸, 피해자의 딸, 그리고 미스미의 딸이 서로 플롯 상의 대구(對句)를 이루며 이야기를 지탱한다.



딸에 대한 부정(父情)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지만, 이 동기가 의문점들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진 않는다. 마지막까지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미스미는 피해자의 딸 사키에가 힘든 증언을 하지 않도록 범행 자체를 부인해 사형을 받는다. 아니, 그렇게 추측된다. 이런 믿음을 확인하려는 시게모리에게 미스미는 '저한테 하신 질문입니까?'라고 되물으며, '좋은 얘기'라고 말한다. 자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만약 방금 당신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셈이라고 말이다. 이어지는 대화는 영화 '세 번째 살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면이다.


그게 설령 살인일지라도?
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죠.
그 말은 결국 저 혼자 사실이라고 믿으려 했다는 겁니까?
정신 차려요. 시게모리씨. 저 같은 살인자에게 그런 걸 기대하면 못 써요.
그럼 당신은 단순한 그릇...?
그릇이라니 무슨 뜻이죠?





미스미의 첫 번째 살인을 맡았던 형사는 미스미가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게 없이 그저 텅 빈 그릇 같아서 더 무서웠다"고 말했었다. 인간은 텅 빈 그릇 같은 존재가 맞다.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그릇의 용도, 그릇의 가치와 정체성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릇은 그릇일 뿐이다. 그릇을 앞에 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그릇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남이 믿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일 뿐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미스미와 시게모리가 대면하는 이 장면은 형식적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창에 비친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겹쳐지는 쇼트에서 그들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시게모리라는 그릇에 미스미가 믿는 이야기가 담긴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미스미라는 그릇에 시게모리가 믿는 이야기가 담긴 것일까? 그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같은 진실을 믿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특유의 명쾌한 진실 같은 건 이 영화에 없다. '세 번째 살인'에서 법정은 이야기를 담기 위한 그릇일 뿐 장르로 기능하지 않는다. 법정은 가장 진실할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그곳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맹세하는 공간에서 되려 진실은 사라진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과연 판단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걸까. 진실을 가릴 자격은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것일까?



미스미는 처음부터 이런 진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가 그랬듯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있다면 만나서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네요"라며 "항상 판사님을 동경해왔어요. 사람 목숨을 좌우하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마지막 살인을 놓고 판사의 자리에 서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30년 전 첫 번째 살인, 지금 재판에 서게 된 두 번째 살인에 이어 결국 '세 번째 살인'은 사형 판결을 통해 사실상 자기를 죽이는 살인을 의미한다. 거듭 진술을 번복하며 그는 진실을 결정하는 위치에 선다.





이야기는 어떤 진실도 보여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그토록 궁금했던 진실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앞뒤로 정지 표시가 돼 있는 사거리에서 선 시게모리의 모습을 짧게 담아내며 막을 내린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으로, 어떤 진실로 나아갈 것인가. 마침 시게모리가 올려다본 하늘은 전깃줄이 사방으로 가로질러 마치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늘조차도 얼마든지 다른 모양으로 재단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보통의 열린 결말은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이건 관객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진실을 재단해보려 하는 관객의 시선 자체를 문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내린 결론이 무엇이든, 그게 정말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크린 밖의 관객이라고 해서 진실을 알아보는 절대적인 시선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진실을 판단할 자격 같은 건 없다. 보이는 대로, 믿는 대로 진실이 되는 것이라면, 진실을 규정하는 행위 자체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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