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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12. 2018

암수살인(2018)-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법에 대하여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암수살인’의 첫 느낌은 ‘추격자'와 유사하다. 도저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살인마와 그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 扮)은 영화 중간에 잡혔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지만, ‘암수살인’의 강태오(주지훈 扮)는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붙잡힌 뒤 감옥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차이점이 ‘암수살인’을 추격 소재의 여타 범죄 스릴러와 차별화시킨다. 강태오를 붙잡은 이후 김형민 형사(김윤석 扮)가 쫓는 것은 범인이 아니라 범인의 과거 행적이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찾는 이 독특한 이야기는, 살인마의 진술 중 어떤 게 진실인지 쫓는 과정을 통해 매력적인 플롯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끔찍한 사건'이 아니라 '실종된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는 올바른 선택을 한다.


암수범죄(暗數犯罪, Hidden Crime)란, 범죄가 발생했으나 수사기관에 의해 인지되지 않았거나 인지됐더라도 증거 불충분 등으로 검거되지 않은 범죄를 뜻한다. 보통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인해 신고율이 낮은 성범죄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기 어려운 도박, 마약 등의 범죄들이 이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신고도 수사도 없어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범죄들이다. 그중에서도 ‘암수살인’이라고 하면 단순 실종이나 가출로 판단되어 살인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은 살인 사건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를 소재로 사회의 시선에 포착되지 못하고 이면에 가려진 치부들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잘못 돌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철저하게 잊힌 피해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무도 모르는 살인, ‘암수살인'은 ‘추격자'와 정확히 같은 지점을 찌른다. ‘암수살인' 속 피해자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회자되거나 기억되지 못한다. 마치 주류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 세상이라는 듯 그들은 세상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이는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추격자’의 미진(서영희 扮)이 그랬듯이 말이다. 비단 살해당한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암수살인’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언제 누구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힐 수 있는 세상이다. 김 형사가 벌이는 수사는 이 불법과 범죄가 만연한 뒷골목들을 훑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종자 전단이 붙은 유흥가 전봇대 뒤 골목에서는 젊은 여자가 토악질을 하고 있고, 옆에는 이를 위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이들을 태우기 위해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강태오가 벌인 범죄 중 상당수는 스페어 택시 기사를 하면서 벌어졌다) 이후 김 형사가 찾는 공간들 역시 비슷하다. 김 형사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도박장을 지나 팔에 주사 자국이 가득한 약쟁이를 만나고, 계단을 오르고 올라 달동네 옥탑방에서 범인의 과거를 뒤쫓는다.


김 형사가 들춰낸 세상의 이면에는 폭력이 만연하다. 하지만 모두가 이를 외면한다. 광안대교 CCTV는 별 이유도 없이 녹화되지 않고 있다. 실적이나 진급과 관계없는 암수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지방청 마약수사대에서 연제서 형사과까지 자진해 나가는 주인공을 동료 형사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강태오가 그린 약도를 따라 토막 난 시체를 암매장한 곳으로 갈 때 '행복한 우리마을 대통령상' 수상을 자축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통해 사람들이 살 만하다고 믿는 곳이 과연 살 만한 곳인지 되묻는다. 그저 누군가의 불행을 외면한 결과가 아닌지 말이다. 아마 수백 건의 암수살인이 벌어지는 동안 살기 좋은 나라 순위 같은 건 올라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속 보일지 모르지만 영화가 이런 부분을 과하지 않게 담아 시대를 반영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영화 초반은 몰입이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살인마가 여죄를 자백하는 동기도, 형사가 사건에 매달리는 동기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물의 동기를 처음부터 드러내는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추측하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동력으로 삼는다. 강태오의 속셈이 밝혀지지 않은 자신의 행각을 무죄로 만들어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의 허점을 이용해 빠져나가려는 것이라면, 김 형사의 동기는 희생자와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살인마에겐 게임, 형사에겐 속죄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김 형사가 동기를 드러내고 변화하는 과정은 좀 불분명하다. 아내의 뺑소니 사고 때문이라고 하기엔 설명이 충분치 않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은 김윤석의 탁월한 연기다. 그의 표정 하나만으로 주인공의 의지, 책임감, 연민이 설명되어 버린다. 그리고 반대 급부에서 그의 집요함을 뒷받침하는 주지훈의 연기 역시 꽤 훌륭하다. 주지훈은 '아수라'와 '공작'에 이어 필모그래피에 좋은 영화를 하나 더 추가했다)



결국 '암수살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살인마'와 ‘(남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는 형사’ 간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일 큰 미덕은 영화 역시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로 시간을 옮겨 강태오의 살인 행각을 화면에 담으면서도, 영화는 이를 잔인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느낌에 차이는 있겠으나 국내 범죄 스릴러의 일반적인 표현 수위를 생각하면 자극적이지 않은 편이다) 굳이 희생자들을 선하고 불쌍한 인물로 만들어 인위적인 동정을 이끌어내지도 않는다. 이들은 똑같이 화도 내고 욕도 하는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살인마를 엄단하는 클라이맥스에서도 영화는 무리하지 않는다. 과한 액션 시퀀스를 넣는다거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섞지 않음으로써, 범죄를 흥밋거리가 아닌 범죄 그 자체로 다루는 데 성공한다. 보통 범죄 스릴러가 취하는 방식을 떠올려 보면(마지막에는 꼭 주인공의 손으로 악당을 단죄해주어야 한다. 후련하게 주먹을 날린다거나, 희생자들만큼이나 악당이 끔찍하게 죽는다거나), '암수살인'이 얼마나 어려운 유혹을 이겨냈는지 알 수 있다.


※ 메시지 측면에서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영화 외적으로 불거졌던 구설이 다소 아쉽다. 결국 큰 탈 없이 개봉하긴 했지만, 영화에서 집중하는 '사람' 메시지에 대해 영화 외적으로는 신경 쓰지 못한 인상이랄까. 영화의 제작과 각본을 맡은 곽경택 감독에게 이전 연출작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아쉬운 일이다. 차라리 실화에 집착하지 말고 모티프만 가져오는 대신 암수범죄라는 소재에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극에 필요한 핍진성을 '실화'라는 언급으로 채우려는 것은 조금 게으른 발상이 아닌가 싶다.



거대한 사회는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면의 양극화와 폭력에 의해 어떤 피해자들이 양산되고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앙금처럼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사람들의 사연은 '살인의 추억'이나 '그놈 목소리'의 잡히지 않은 범죄자만큼이나 큰 분노를 일게 한다. 이 잔인한 일들을 대체 누가 그랬는지 모르는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은 끔찍하기에 앞서 슬픈 일이다. 


'암수살인'의 마지막 장면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사체가 발견됐던 농수로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끝까지 범인을 찾았던 두만(송강호 扮)처럼, 김 형사는 휴대폰 위치추적 결과 실종자가 마지막에 있었던 곳에서 '니 어디 있노'라고 읊조리며 끝까지 피해자를 찾는다. 살인마는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김 형사나 관객이나 마음속에 개운치 않은 앙금이 남는다. '암수살인'의 형사는 영웅이 아니다. 그저 사라진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남보다 조금 더 궁금했던 경찰일 뿐이다. 우리 역시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그저 통계 뒤에 숨어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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