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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16. 2018

어바웃 타임 -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

About Time, 2013


'어바웃 타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만 꼽으라면, 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 중에서 고를 것이다. 바닷가로 피크닉을 가고, 정원에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평범한 장면들. 아무리 봐도 내겐 이 영화가 워킹타이틀의 로맨스물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 선 가족의 이야기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 扮)은 남들이 다 짝을 찾는 신년 파티에서도 혼자인, 소위 '찌질남'이다. 그의 괴상하게 붉은 머리카락과 비쩍 마른 몸으로는 어느 이성에게도 어필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가 원하는 때로 시간을 되돌리는 시간 여행 능력이다. 


사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는 흥미로운 동시에, 그다지 참신하지 않은 설정이다. 사람들은 실제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에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미래를 미리 알아볼 수 있기를 꿈꾼다. 이런 꿈은 상상과 공상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로 재현됐다.


'어바웃 타임'의 팀과 같은 보통 사람을 시간여행자로 설정한 영화도 참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시간여행자의 아내'와 같은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야 하는 남자, 혹은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남자의 고군분투와 비교할 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정말 너무나 편리한 능력을 지녔다. 언제든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예를 들면 벽장이나 화장실)에서 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지금까지 등장했던 그 어떤 시간여행자의 힘보다 강력해 보인다.



실제로 팀은 러닝타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강한 남자가 된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비범한 능력이 아니라, '사랑', 그리고 '가족'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명제에 충실한 한 남자의 아주 뻔한 인생을 지극히 담담하게 담아낸다. (사실 이 평범함이야말로 절대 뻔하지 않은, 엄청난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시간 여행 능력은 갖가지 해프닝을 일으키지만, 그는 꿋꿋하게 소중한 것들을 위해 나아간다.


어쩌면 기상천외한 로맨스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영화는 아주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건넨다. 팀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순전히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목적으로만 사용한다. 복권 당첨 번호라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개인의 영달을 위한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하긴 영화 자체가 주인공에게 별다른 갈등 상황을 부여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그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의 빌 머레이처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마법 속에 갇힌 것도 아니고, 자신이 죽고 마는 미래를 미리 목격한 것도 아니다. '나비효과'의 애쉬튼 커쳐처럼 자신의 불행한 과거와 그로 인한 나비효과를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평생의 사랑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 扮)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작은 말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열정적인 밤을 몇 번이고 다시 경험하기 위해, 참으로 사소한 시간 여행을 거듭한다.

 

가장 거창한 시간 여행이라고 해봐야 다른 사람의 여자친구가 된 메리를 되찾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나기 전 시간으로 되돌아간 것, 동생의 교통사고를 되돌리기 위해 망나니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준 것 정도다.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마고 로비 扮)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모든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메리에게 돌아와 청혼하는 팀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간 여행 능력이 필요치 않은 인물이다.



그는 시간을 거스르는 능력을 지니긴 했지만, 사실 어느 누구보다도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그가 시간 여행 능력으로 가장 욕심을 부렸던 것이라고 해봐야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 정도였다. 정말 이렇게까지 순박한 시간여행자가 있었던가. 영화는 그토록 평범한 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거듭 강조한다. 


영화는 결국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사랑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역설한다. 그래서 영화 속 장면들은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거센 비바람과 함께 하는 결혼식 장면도 그렇다. 주례 선생님들은 보통 어떤 풍파에도 변치 않는 사랑을 강조한다. 영화는 이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을 화면에 담아, 빛나는 순간이 곧 영원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어바웃 타임'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현실을 환기한다. 우리는 모두 시간 앞에 공평하게 산다. 모두가 하루에 24시간을 살고, 일 년이면 365일을 산다. 참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 시간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고스란히 각자의 몫이다. 평범한 삶, 평범한 일상은 하찮게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한 오늘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하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시간 여행 능력이 없다. 대신 상상을 해볼 수는 있다. 지금 나에게 닥친 일들이 인생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힘든 시련을 좀 더 짧게 넘기고, 행복한 시간은 길게 추억하는 시간여행자가 될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한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생신날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가족이 한 명씩 더 생길 때마다 어머니 스스로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고. 가족이란 곧 내가 되는 지점과 영원히 순간 속으로 들어오는 지점이 그렇게 맞닿는다.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이었다. 나는 그때 시간여행자가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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