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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seo Nov 21. 2018

리틀 포레스트(2018) - 청춘의 허기를 채우는 밥상


뻔하지만 들어줄 만한 조언

‘리틀 포레스트’의 첫인상은 반짝이는 화면에 담은 ‘시골쥐와 도시쥐’ 이야기 같다. 도시 생활에 환멸을 느낀 청춘들을 시골로 데려와 위로하며 귀농 생활을 예찬하는, 그런 이야기. (실제 귀농 생활이 이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은 1세대 귀농인들의 사연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조금 뻔한 구도다.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미뤄둔 사람들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별 내용 없이 심심할 것 같아서’, 혹은 '위로랍시고 뻔한 얘기들만 할 것 같아서’. 틀린 얘기는 아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전반적으로 심심하고, 종종 뻔한 얘기들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진다. 경우에 따라 마음의 키가 조금 자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는 뻔하지만 힘주어 하지 않아서 가만히 듣고 있을 만한 얘기 같다. 똑같은 조언이지만 친한 친구니까 참아줄 만한, 간혹 한 번은 새겨듣게 되는, 그런 말들이 있지 않은가. 감독의 세심한 접근 덕분인지, 투명함이 느껴지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인지, 아니면 보는 것만으로 배고프게 하는 음식들 덕분인지 몰라도, 영화는 늘 친한 친구가 있던 자리에 앉는 데 성공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무렇지 않게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친구 같은 영화다. 




청춘의 허기에 대한 이야기


도시쥐가 앓는 질환에 대해 영화가 진단한 병명은 바로 '허기'다. 주인공 혜원(김태리 扮) 역시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스스로도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고 하고, 서울의 인스턴트 음식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고 고백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혜원의 귀향은 허기를 채울 방법을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엄마의 가출 이후 그에 질세라 이곳을 떠났지만 마음에 새로운 먹거리를 찾진 못한 셈이다.  


영화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상태 역시 '허기'로 규정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데서 오는 상실감은 마음에 구멍을 만든다. 갖고 싶고 가져야만 할 것 같은데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은 욕구를 만든다. 무엇으로든 마음의 구덩이를 채워야 할 것 같은 욕구.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게 무엇이든 일단 삼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내 그게 상한 편의점 음식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먹을 수 없는 음식, 그걸로 배고픔을 달래려 했다가는 더 큰 탈만 나게 될 음식들이다. 남들 다 하는 회사 생활이라고 견디기엔, 비인간적인 대우와 모멸적인 언사는 다반사요, 노래방에서 탬버린이나 흔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청춘은 허기를 빌미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영화는 지친 청춘들을 데려다 천천히 허기를 채우게 한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시골 밥상을 인스턴트로 대표되는 도시의 음식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나온 음식만 해도 무려 16가지. 배춧국, 김치 수제비, 배추전, 팥 시루떡, 막걸리, 꽃 파스타, 양배추 샌드위치, 아카시아꽃 튀김, 크렘 브륄레, 오이 콩국수, 떡볶이, 밤 조림, 곶감 등이다. (채식주의자인 임순례 감독의 성향이 반영되어 고기 요리가 없다. 삼겹살에 소주가 나오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도시 음식과의 대비가 무너질지도 모르니) '리틀 포레스트'를 단순히 먹방, 쿡방 트렌드의 일환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배고픔에서 비롯된 콘텐츠라는 점은 유사하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아무 음식으로나 허기를 채우라고 권하지 않는다.  




시간은 저절로 흐르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상실감과 박탈감을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계절이 지나고 농작물이 자라는 것처럼 영화 속 청춘들의 마음이 자라난다. 하우스 안 토마토와 노지 토마토가 자라는 과정도 맛도 다르듯이, 청춘들은 제각기 다른 빛을 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결국 모두 저마다의 시련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름 장마일 수도 있고, 가을 비바람일 수도 있다. 오래 준비한 시험에 떨어지거나 연인과 헤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맘대로 되지 않는 회사 생활이거나 주인 행세하는 직장 상사일 수도 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식의 뻔한 헛소리를 하는 대신 ‘리틀 포레스트’는 아프더라도 결국 성장한다는 얘기를 건넨다. 시간이 저절로 흐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으며, 덥고 추운 사계절을 온전히 견뎌낸 것만으로도 조금은 자란 것이라고 청춘들을 응원한다. 때로는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영 쓸모없는 시간이란 건 없다고 위로한다. 바람에 떨어진 낙과(落果)는 잼으로 만들 수도 있고, 정 안되면 초보 농부의 수업료인 셈 치고 내년 농사를 기약하면 될 일이니까.


특히 주인공 혜원을 자라게 하는 것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다. 엄마와의 기억 역시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자란다. 엄마가 만들어 주던 음식들을 하나씩 따라 만들 때마다 과거의 시간이 주인공을 한 뼘 더 성장하게 한다. 그 시간 동안 뭔가 특별한 것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 시간을 온전히 지내왔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농작물들이 실은 그렇게 자란다. 땅에 심은 씨앗은 열매 속에서 크던 기억을 갖고 자란다. 엄마의 레시피를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혜원이라는 씨앗은 더 단단하게 자랄 준비를 한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아주심기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숲을 갖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엄마의 편지 속 감자빵 레시피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인정이자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만의 레시피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찾은 레시피를 담아 답장을 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배려 가득한 시선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겨울만 있는 것 같은 현실 앞에 선 20대들이 볼 때 '리틀 포레스트'는 그저 작은 판타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고 세상은 숲이 아니다. 영화가 던지는 은유는 선명한 만큼 뻔하기도 해서 외려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판타지면 어떤가. '리틀 포레스트'는 스스로 판타지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들 마음속에 판타지에나 나오는 작은 숲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꿈을 꾸는 게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꼭 청춘에 국한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 하나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법이니까. 나이와 관계없이 도시에 사는 모두가, 스스로에게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물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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