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무서운 응급실...

2006년 4월 응급의학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4월 밖에 안됐는데 벌써 응급실 인턴이다. 미치겠다.


응급실 근무에 대해서는 선배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크게 다쳐서 오는 환자들과 컴플레인 하는 보호자들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건 피곤에 쩔어있고 신경질적인 1년차들!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를 파악하고 1년차에게 보고하는 것을 노티 (notify의 준말, noti) 라고 하는데, 제대로 준비해서 노티를 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혼난다고 들었다.


이번달 응급실 인턴은 낮턴 3명, 밤턴 3명으로 총 6명인데,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낮턴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아침에 오리엔테이션을 듣기 위해서 응급의학과 의국을 찾아서 응급실에 들어가는데, 응급실 입구 바깥쪽까지 여러개의 베드가 늘어서있고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응급의학과 학생실습 돌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 환자들을 다 우리가 1/n 로 나눠서 초진을 하고 초기평가를 해서 한명 한명 진료과에 보고 및 배정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첫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의국장선생님과 만났다. '환자의 치료계획에 대한 결정이 인턴의 미숙함으로 인해 늦어지는 상황이 제일 무서운 상황이다' 라는 경고를 들었다.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는 빨리 환자를 진료과에 배정을 해야 하고, 진료과 입장에서는 평가가 끝나서 확실하게 해당 과의 환자가 맞는지 알고 싶을 것이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국장선생님과의 미팅이 끝나고, 밤턴 3명은 숙소로 향했다. 나를 포함한 낮턴 3명은 마지막 응급실 근무를 마치는 3월 인턴들에게 인계를 받았다. 나에게 인계를 해준 인턴은 안면이 있는 타교 출신 선생이었는데, 생각보다 할만하다는 따뜻한 말을 건넸다. 근데 왠지 인계를 다 하고 떠나는 표정은 엄청 후련해보였다. 내가 인계받은 환자는 2명이었는데, 객혈 (hemoptysis) 로 지금 방금 내원한 할아버지와 열나서 내원한 소아환자였다.


소아과의 경우 전공의선생님이 응급실에 상주하고 있어서, 나는 전공의선생님이 시키는 잡일만 하면 됐다. 바로 전달 호흡기내과에서 '잡일만 해서 슬프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은 '잡일을 해서 기쁘다'는 생각을 했다.


호흡기내과 환자는 어려웠다. 뭐부터 해야되는지 갈피를 못잡고 있으니 응급의학과 전공의선생님이 환자분에게 문진해서 확인할 것을 몇가지 주셔서, 클립보드에 초진차트를 준비해서 갔다. 일단 혈압, 맥박 등의 바이탈은 괜찮아 보였다. 객혈 환자이니, 당연히 기침하면서 어느 정도 출혈이 있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응급실 인계장에서 '소주 한잔, 맥주잔 반잔, 등등' 환자가 쉽게 표현할 수 있게 답을 유도해야 한다고 읽었던 기억이 났다.


첫 환자라서 더 긴장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4월에 바뀐 호흡기 1년차가 상당히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몸집이 왜소하고 얼굴이 창백한 선생님인데, 병동간호사나 인턴들에게 상당히 신경질적이라서 다들 좀 슬슬 피하는 분위기였다. 이 선생님은 지난달에 신장내과 1년차였는데, 응급실 인턴이 ABGA를 보고하면서 PH가 7.23 이라고 했더니 "7.23 몇인데!!!!!" 라고 소리를 질러서 인턴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ABGA pH의 소수점 세째 자리를 물어본 것이었다.) 하필이면 첫 환자가 호흡기라니... 어쨌든 할아버지의 히스토리를 최대한 자세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기침하면서 피가 얼마나 나왔어요?'

'어? 뭐라고?'

'피가 대략 얼마 나왔냐구요? 소주 한잔 정도였어요, 아니면 맥주잔으로 반잔 정도였어요?'


할아버지 옆에 서있는 며느리는 객혈했을 당시에 같이 있지 않았다고 하고,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들리는데다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나중에는 할아버지 귀에 대고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치료를 잘 하려면 피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야 해요!!!! 얼마나 나왔어요!?!?!?!?!'

'소주잔 한잔 정도에요!?!? 맥주잔 반잔 정도에요??? 더 많아요???'


드디어 할아버지가 질문을 이해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응, 피가 솔찮이 나왔어.'


그 뒤로는 잘 기억이 안난다. 초진차트를 대충 쓰고 호흡기에 노티를 했고, 예상대로 엄청나게 깨졌다. (전화기에 대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주변 사람들 눈치가 안보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다발성 외상환자와 CPR 환자 등등 쉴새없이 들이 닥쳤고, 자리에 한번도 앉지도 못하고 첫 근무가 끝났다. 근무가 끝날 때 나는 진료과 노티를 못한 차트를 4개 들고 있었고, 내가 인계해준 밤턴은 얼굴이 울상이 돼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근무를 끝냈다는 느낌보다는 나 때문에 응급실이 엉망이 됐다는 느낌이 훨씬 컸다. 다른 낮턴 2명과 얘기를 해보니, 둘다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나보다. 응급실 근무를 하는게 무섭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하루 근무를 하고 나니 불안감이 좀 덜했다. 잘하든 못하든, 내일 일어나서 응급실에서 일할 때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대충 알게 됐다.

화, 목, 토 연재
이전 08화내과 마지막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