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유괴단 떨어진 후기

그게 내용이랑 무슨 상관일까 싶은 글

by 준성

무너지는 자존심


얼마 전 지인과의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제가 갑자기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어서 호주로 떠나버릴 수도 있잖아요"


스카이다이빙을 해본적도 없고, 호주도 가본적 없었다. 대충 내 미래를 나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며칠 동안 이 말을 곱씹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분명히 나는 그럴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역치가 굉장히 낮은 사람이다. 어떤 곳에서든, 어떤 모양새로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갑자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거나 셰프가 되겠다고 해외로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 거리에서 삐에로 가면을 쓰고 간판대를 돌리는 일도 할 수 있다(해본적은 없지만).


나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 두려움이 적은 편이고, 그래서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남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시도해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은 누가 나한테 시켜서 한 것들이 아니며, 그렇기때문에 내가 가진 장점은 남들과 다른 실행력과 추진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가고 싶었던 돌고래유괴단 지원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연인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생각만 많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


솔직히 자존심이 아주 많이 깎였다.

그래? 그럼 지금까지의 나는 대체 뭔데? 누가 얼마나 더 대단한 실행력과 추진력을 갖고 있는데?

교만하게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하지? 순간적으로 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정성스레 내 자소서와 이력서를 돌봐주는 연인에게 이러한 말들을 내뱉지 않고 씹어 삼키면서, 속으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뭔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왜 감추고 싶은 것을 들킨 느낌일까.



나의 문제점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스운 기억이 있다.

태권도를 배워보고 싶던 나는 7살이었는데, 도저히 부끄러워서 학원을 갈 수가 없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는 몰랐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분위기는 괜찮을지 너무 걱정되고 무서웠다. 고양이가 처음 보는 사람을 피해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내밀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위해 함께 태권도장에 가서 구경을 해주었다. 이윽고 용기가 난 나는, 그 뒤로 한 달 동안 혼자 태권도장에 가서 구경을 했다. 태권도를 배우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내가 이 학원을 잘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을 하며.


진짜 웃기는 녀석이다. 그걸 냅둔 관장도 웃기다. 물론 그 한 달 뒤에 나는 태권도를 시작했고, 품띠를 따는 등 태권도장에서 재밌게 태권도 생활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생각해보니 나는 무엇을 시작할 때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장난감을 하나 사는 데에도 진열대에서 장난감을 들었다 놓았다, 요리보고 저리보고,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가보고, 두 바퀴 돌고 다시, 세 번째가 되어야 사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나는 중고거래도 엄청나게 잘하는 편이고, 택배거래도 자주한다. 나는 이미 그 물건에 대해서 모두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구매하는 물건이 어떤 상태일지 대충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실행력과 추진력에서의 자신감은, 실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용기가 있던게 아니라 생각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10을 생각하고 1을 시도하면 나는 100을 생각하고 3을 시도했다. 절대적인 도전의 양은 많을지 몰라도, 실행하는 데에는 젬병인 셈이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여겨서였을까. 생각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이것을 해야 하는 이유,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하고 싶은 이유, 하고 싶지 않은 이유, 다른 대안, 대안이 실패했을 때의 대안...


생각이 많은 것이 좋으려면, 그 생각들을 하나하나 깊게 되짚어보면서 내것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면서 최후의 결론은 늘 미결로 놓아두었다. 이것은 나의 장점이기도 하면서,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매듭짓지 못한 생각은 어디에선가 스멀스멀 존재감을 과시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내게 생각의 매듭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닫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뻗어나가는 것들을 나는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



그러던 와중에, 아직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내가 가졌던 의문의 발원지를 알 것 같았다. 왜, 생각이 많고 실천이 없다는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나는 주인공들을 두고 봐줄 수가 없었다. 기시감을 느껴서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아주 대충 말하자면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 얘네들은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보면서 답답할 지경이었다. 특히 프라두는 나였고, 나는 프라두였다. 책에서 프라두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이 있을 정도로 생각이 깊으면서도, 유일한 친구였던 조르지를 부러워 했다. 조르지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프라두는 결코 조르지가 될 수 없었다.


소설이 좋은 것은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고, 멘탈이 약하고, 예민한 사람.

인정을 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내가 살아오며 해온 모든 선택들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절대 그리스인 조르바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두목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약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고, 바르고, 굳세고,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바라던 것과 정확히 대립되는 인간상을 품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인정함으로써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꿈 같은 이야기가 있다. 믿고 싶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억눌린 부분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고, 그렇게 억눌린 감정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확 튀어나가면 후회를 하니까. 나 또한 너무나 그렇고,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경멸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모른다 라는 말을 나는 자주 쓰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엇인가에 확고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멋있으면서도 불안한 일이다. 의견을 뒤집게 될 때 그 사람은 가장 두려움을 느끼게 될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나는 모든 글에서 얘기 하지만, 기실 그렇게 태어나지를 못한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 의심하고, 다른 가능성을 따져보고, 그 무한의 굴레에서 대부분의 것들을 직접 선을 그어가며 소거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르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것이 나의 도전의식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내가 인정하기 무서워 했던, 바로 그 말을 연인이 해줬고 나는 이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쁘냐? 하면 아니다. 나쁜 게 어디있나. 브런치를 쓰고 조금씩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면서, 몇 가지 규칙을 세우기로 했다.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되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말자.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나 혼자 이런 것도 아니다. 모두에게는 비슷한 점들이 있고, 바로 그 부분이 각자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할 수도 있다'와 '하고 싶다'의 차이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돌고래 유괴단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이야기의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바로 어제, 돌고래 유괴단 1차 발표가 났다. 나는 탈락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속상하지 않았다. 여우가 높이 매달린 포도를 두고 분명히 신포도일 거라며 스스로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사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은 광고를 사랑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광고를 하고 싶은 사람이 들어가는 것이 맞았다. 나는 그들의 영상이 좋았던 것이지, 광고가 좋았던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럼 이제 다르게 생각해야했다. 왜? 왜 나는 속상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어떤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지금 당장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호주로 떠나지 않는다고 속상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똑같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래, 나는 갑자기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호주로 훌쩍 떠날 수도 있다. 갑자기 도자기 장인이 되겠다고 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어쩌면 돌고래 유괴단에서 기가막힌 광고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을 수도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을 거치고 스스로를 검열하고 이를 다시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생각들이 뒤섞이게 된다. '그래, 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어느새 '그럼 난 이걸 하고 싶은 것인가?'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첫 물꼬를 오해하며 발전시켜 나가다 보면 수많은 가능성들에 매몰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면 골치가 아파진다. 특히 그것들을 '어느 정도' 잘해낼 능력까지 있다면, 아주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할 수 있는 것의 허들이 낮은 나에게는 유독 위험한 사고였다. '그럴 수 있다'와 '그러고 싶다'는 다른데 말이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거슬러 올라가보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때로는 내게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전혀 아닌, 이 양면성을 지닌 습관이 나를 형성했다면 내가 어떤사람인지 한번에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잠에서 퍼뜩 깨듯이 인지했다면, 그제야 스스로를 바로 볼 기회가 생긴 것일 테다.

그러나 이것을 인지했다고 변화를 스스로 촉구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인지가 곧 변화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선택의 문제이고,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관성을 거슬러 매 순간마다 스스로를 시험하게 되는 의지이며, 그래서 변화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두 가지였다. 일부 수용과 일부 변화이다. 내가 선택지를 지워야만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선택지를 지워나가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생각의 매듭을 짓기로 마음 먹는 것은 변화에 해당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하고, 가능성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생각'은 효율과는 관계가 없고, 단지 얼마나 깊이, 충분히 스스로를 이해하느냐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이해함을 바탕으로 내리는 결정은 언뜻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미 너무나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쳐서 발현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난하게, 무수히 많이 거쳐야만 내가 생각의 주도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내가 두려운 것은 오직 스스로를 잊은 채 사는 것이다. 나의 기호와, 취향과, 분위기와, 고유의 특징을 상실한 채 사는 것이다. 다양한 페르소나는 사회를 살아내는데에 필요하지만, 결국 가면을 벗게 되었을 때의 '나'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때의 나는 내가 그동안 살아오며 해온 선택들의 집합일 텐데, 그 선택의 과정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을 매듭짓는 것이 한 사람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든 것에 매듭을 지어버리면,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꼰대스러움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래서 매듭은 어느정도 느슨해야하고, 때로는 이를 단칼에 잘라낼 수 있는 알렉산더의 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은 뼛속을 깊이 시리게 만든다. '왜'에 집착하다보면 사람이 허무해진다. 사는데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본질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엇보다 큰 자유를 선사한다. 더욱이 그렇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본인이 마련해나갈 수밖에 없으며, 전체적인 인간의 삶에 있어서 '왜'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때가 되어서야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얼마 전 사진업계의 사람을 찾아가 인사이트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얘기를 쭉 듣더니, 내게 다른 형태의 '축구'가 필요한 것 같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축구에 쏟았던 열정이 옮겨갈 대상이 필요하다고. 내게는 정말로 그것이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축구를 그만둔 것이라고, 가끔 애정어린 놀림을 받는다. 그말에 동의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따라 웃기도 하지만, 가끔은 속이 너무너무 쓰리기도 하다. 원했던 것을 그렇게 크게 좌절당해본 경험은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무언가에 정말로 진심이어본 사람들은 내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포기해야하는지 그 끝을 들여다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단순한 태도를 갖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냥 묵묵히 리스트에서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잘 알고 한 발을 내딛는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이 단단한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는지...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달관한 태도로 그렇게도 살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답을 내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그러한 태도가 배어나오는게 아니라면, 그다지 부럽지는 않다. 아직 생각의 매듭을 덜 지은 나는 그래서 이렇게 헤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돌고래 유괴단에 떨어졌다는 것은 맥거핀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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