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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Mar 27. 2020

당신의 장롱 속 숨겨놓은 3가지

돌반지, 집문서.. 그리고 달갑지 않은 하나.

아이의 생애 첫 돌잔치에서 받았던 소중한 돌반지, 처음 마련한 집의 집문서(등기필증)를 집안 가장 깊숙한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놓았다. 자금의 여유가 있는분들은 미니 금고가 장롱 한편에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드레스룸과 펜트리, 그리고 붙박이장이 대세이니 깔끔하게 수납이 되어있을지도...


예전부터 소중한 것을 장롱 속에 고이 보관하곤 하지만 달갑지 않은 것, 하나가 있다. 바로 장롱면허라 불리는 그것.. 운전면허증이다. 오래된 와이프의 지갑 속에서 면허증을 꺼내 갱신일을 확인하였다. 언제 취득했는지 모르게 벌써 10년이 지나 갱신기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와이프의 운전 면허증. 10여 년 전 젊고 예쁜 그녀의 사진이 날 바라보고 있었고, 옛 주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난 이 사진 속 사람과 결혼했었지.'라고 잠시 상상에 빠졌다. 최근 육아로 지친 그녀의 최근 모습처럼 면허증은 어느새 빛바랜 '신분증명서' 한 장으로 남아 있었다.


낡은 운전 면허증만큼이나 와이프의 운전에 대한 실력과 감은 요즘 말로 '1도 없다'. 정확하게는 떨어질 실력 자체가 없다. 면허는 취득만 했을 뿐이지, 운전 경력이 전무했다. 과거에 몇 번 아버지의 차를 몰았다고 하지만,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 맘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녀의 면허증은 제2의 신분증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아내의 면허증을 이야기 꺼낸 이유는 와이프가 아이를 위해 운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운전을 시작하겠다고 나에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운전 연수를 부탁하였다.

'음 아주 좋은 생각이야. 굉장히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이야..'

라고 생각할 찰나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으로 초보 운전자의 차량 전복 사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터넷에서는 차량의 결함인지, 김여사님(비하 의도 1도 없음)의 불찰에 의한 사고인지 갑론을박으로 시끄럽다. 그런 상황에  운전 연수라...  어째서인지 지옥의 도로 연수 교육이 될 것 같았다.


도로 연수만큼은 가족에게 받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지만..  나는 흔쾌히 오케이를 외쳐 버렸다. 사설 도로 연수 교육비가 아까웠을까? 아니면 와이프의 안전한 운전을 직접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



「 실기보다 어려운 필기  」


지옥의 운전 교육이 시작되었다. 실제 운전 교육에 앞서 실기보다는 필기를 우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여기서 잠깐 퀴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내 와이프를 비난하기에  앞서 당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본다.

P R N D

자동차 기어봉의 약자의 의미를 모두 아는가? 어서 대답하라. 롸잇나우. 지금 당장.

.

와이프가 대답했다.

" P는 Parking. 이건 주차지? "

아주 순조로운 출발이다. 칭찬해주어야 할 일이 맞는지 의심스럽지만 아주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N부터 우려는 했지만.. 역시 내 예상은 비켜가지 않는다.  

그녀의 답변은 "Normal... "

충분히 그녀의 오답은 이해가 된다. 그 정도는 인정. (이후 친구 놈들에게 물어봤으나 제대로 대답하는 이가 몇 없었다.)

정답은 neutral이다. 중립이란 뜻이다. 


다음 질문은   "후진은 영어로 뭘까? "

그녀는 상쾌하게 대답했다.

 "Back"   

답변은 명쾌하지만..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R 이라구. R...  왜 R일까? "

"음.. Return...? "

당신의 창의력에 박수를 보내야 할까.. 무지하다고 직접 말하면 노여워할 테니. 나는 R의 부연 설명을 위해 90년대 워크맨의 오토리버스( Auto reverse ) 기능을 설명했다. 쿨의 4집 노래 중 오토리버스라는 노래를 들려주며 이해를 시켰다. 인간은 스토리나, 연상되는 기억들은 쉽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주일 후 와이프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내 와이프를 욕하지 말라. 더 좋은 예시를 들지 못한 나에게 돌멩이를 던지길 바란다. 계속된 이론 교육으로 깜빡이와 와이퍼 사용법. 공조기까지 교육을 하고 비로소 필기 교육이 끝났다. 한국 교육울 탓해야 하나. 망각한 우리의 뇌를 탓해야 하나. 둘 다 원망스러운 한국의 주입식 필기 교육 시간이었다.  



「 위트가 대세 」


' 아이 없어요. 저부터 구해주세요.'

' 말(horse)이나 살 껄 그랬나 봐요. '

' 지금까지 이런 초보는 없었다. 이것은 엑셀인가. 브레이크인가. '

도로 위 센스 있는 초보 스티커는 무료한 운전자에게 잠깐의 즐거움을 준다. 앞서가던 초보 차량에게 답답함을 느낄 찰나 스티커를 보고 노했던 운전자의 마음은 금세 누그러든다. 짧은 위트로 운전 고수들에게 웃음을 주고 부족한 운전 실력에  양해를 구할 수 있다면,  동참하고 싶어 졌다. 슬쩍 미소를 안겨주는 스티커를 붙여 주고 싶어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아이디어가 부족하다. 그래. 요즘 대세 '초성'으로 위트를 발휘해보자. 그렇게 가정용 프린트로 뽑아 차량 뒤편에 멋지게 부착하였다.

설마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뒤에서 빨리 가라고 빵빵 거리면 어쩌지? 설마 초보라고 똑바로 표기하지 않았다고, 누군가 신고하진 않겠지? 도로교통법에 위배되진 않겠지? 소심한 생각도 잠시. 나는 와이프에게 진심으로 선물하고 싶은 의미가 있었다.


진심으로 와이프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숨겨진 의미는 첫 발, 출발 그리고 축복 이었다.



「 그녀의 ㅊㅂ : 첫 발 」


그녀는 최근 지친 육아 생활을 하며 버릇처럼 말했다.

"자기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좋겠다.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모임도 나가니까 말이야. 항상 바빠 보이는 당신이 부럽네. "

그녀 자신은 꿈이란 게 없다고 말했다. 경단녀, 독방 육아의 주인공인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었고, 나 또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단다. 물론 육아라는 필요에 의해 생긴 목표이지만, '운전'이란 목표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첫 스텝. 누구나 현실을 탓하고 원망한다. 가장 쉬운 일이니까 말이다.   

·두 스텝. 그리고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 자신의 돌파구나 해결책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스텝.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이다. 마지막 단계의 실행을 행동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쉽지 않은 일이다. '나중에 하지 뭐'가 아니라.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마음을 먹었다. 나에게 과감히 요청했다. 어떻게 첫술부터 배부를 수 있겠는가. 누구나 시작은 미비하다.  


누구나 첫 발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와이프의 운전 교육을 흔쾌히 허락한 이유이다. 나는 그녀의 '첫 발'을 응원한다.



「 나의 ㅊㅂ : 출발 」


나도 혼자 운전을 해보기만 하였을 뿐, 누군가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일은  처음이었다. 처음이다 보니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면 조금(?) 큰 소리로 와이프에게 열을 냈다.


"아냐 아냐. 지금지금 엑셀 더 밟아. 차선을 변경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확실히 출발하라고.  자신이 확신이 들었으면 과감하게 밟고 나가야 해"

"주춤주춤하고 도로 가운데  가만히 있으면 더 위험하다고. "


초보자에게 가르치는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윽박지르고  있었다. 말은 뱉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보에게 너무 열을 낸 게 아닌가 하고 후회가 살짝 된다.

'너는 얼마나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잘 살고 있냐? '

나중에 와이프가 본인에게 되물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당당하고, 떳떳함을 주장하던 나는 한치의 두려움 없이 삶속에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뒤돌아 보니, 시작도 못하고 미뤄두었던 유튜브의 시작. 매일의 글쓰기.. 1년의 계획들이 주춤주춤 정체하고 있지 않았나. 미래 꿈에 대해 확신이 있고 그곳을 향해 전력질주해야 된다고 생각 하면서, 출발부터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확신이 있으면서도 왜 엑셀레이터를 신나게 밟고 나아가지 못했나. 무서워서 도로 위 브레이크만 밟고 서있다면,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가든지 말든지.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밟고 있던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액셀을 밟고 당장 출발을 해야겠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 우리의 ㅊㅂ : 축복 」


초보가 느낄 수 있는 축복을 잘 알고 있다. 처음 도로를 나가 운전하면 모든 것이 새롭다. 1~2시간쯤은 거뜬하고 피곤할 겨를이 없다. 초보의 눈에는 모든 도로가 신기하고 긴장되며, 즐겁다. 차가 밀리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모두 신기하다. 처음 차를 샀을 때는 모든 심부름이 가볍고, 픽업 콜도 즐겁게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초보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차가 밀리거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얼굴을 찌푸리고 화부터 낸다. 언제부터 운전의 고수가 되었고, 도로 위에 폭주꾼이 되었을까?


초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든지 축복일 텐데 말이다.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든다면,  "먼저 가세요-"

먼저 양보해주면   "감사합니다-"  

앞에서 사고가 났다면  "큰 사고 나지 않아 감사드립니다-"

비가 오면 운치있고, 차가 밀리면 음악을 감상하며 여유롭게 가면 된다. 미숙해서 위험하기보다 자만으로 인한 과속과 태만이 교통사고의 더 큰 이유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빠르게 목적지로 가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 설렘을 가지고 나아가는 과정이 축복임을 느끼고 있었다. 와이프와 나는 8번째 연수를 마치고서야 약간의 여유를 찾았다. 목적지 없는 도로 주행 코스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든 과정이 행복이고 즐거움이었다. 같은 코스를 배회하면서 대화도 하고, 고함도 치고,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런들 저런들 모두 즐거움의 과정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ㅊㅂ'는 세상의 첫 발이자. 출발이자. 축복이다. 도로에서 초보를 만난다면 그들의 상황을 응원해주는건 어떨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초보의 행복한 마음을 가지자. 혹시 아직 도로로 나가지 못한 무경험자라면 당신이 숨겨둔 것은 운전면허증이 아니라 '겁'이었음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꺼내자.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당신의 꿈의 출발, 시작을 의미하는 첫 발, 미래의 축복 임을 증명해내면 되니까.   


초보인 당신을.  그리고 내 와이프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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