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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테크르르 Mar 25. 2020

난생처음 양다리를 걸쳐보고 싶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

‘글’보다 이미지를 사랑하고, ‘글’보다 그림을 좋아하며, ‘글’보다 사진이 익숙하다. 내 직업은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4년의 학교 생활과 10년의 회사 생활을 합하면 이미지와 함께 동거한 지 벌써 14년 째다. 하루 8시간의 업무 시간은 모든 것이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수천 장이 이미지들이 내 모니터를 거쳐가고, 폴더 별로 저장된 수백 장의 이미지를 가공하여 새로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글보다 이미지가 익숙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글쓰기는 진부해 보였다. 흰색 종이 바탕에 검은색 글자들. 마치 딱딱한 바둑판 위 흑과 백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은 글자요. 이것은 흑돌이니.’ 글자는 읽을 줄 아는데 그 내용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고, 바둑알 개수는 셀 줄 아는데 바둑 경기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는 느낌과 같았다. 글자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각들이 너무도 매력 없이 느껴졌다. 반면, 대중들이 열광하는 인스타그램을 보면 어떠한가. 이미지 한 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며 빠르게 스캔할 수 있다. 이어찌 이미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지를 사랑하는 디지털 시대 ‘신(new) 문맹인’ 일지 모른다. 어쩌다 글자는 읽을 수 있는데,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문맹인이 되었을까. 비통한 일이다. 늦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디지털 문맹인의 결핍은 독서로 시작됐고, 독서는 글쓰기로 흥미가 연결되었다. 왜냐고? 책에 나오는 모든 저자들이 글쓰기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모든 성공한 자들은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공하려면 독서를 해야 하고, 삶을 가치 있게 살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은 진리였다. 이렇게 타의에 의해 억지로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어렵고, 어색했고, 지루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글쓰기의 매력을 오롯이 느낀 것은 인터넷상 소통 글쓰기였다. 내 글은 후기, 감상, 책 리뷰 따위에 불과하나 글을 보고 누군가 댓글을 남기고, 공감해주는 것이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 나와 다른 사람 생각이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 글쓰기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원고 한 편이나, 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정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얀색 종이 위에 나의 생각과 상상을 펼치고, 누군가와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읽히지 않는 글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메아리도 누군가에게 들렸을 때 의미가 있다. S.O.S 의 신호인지, 영화 ‘러브레터’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울리는 간절한 “오겡끼 데스까” 의 외침인지 말이다. 내가 외친 글 한편에 누군가 ‘와따시와 겡끼 데스’라는 답변이 나에게 글 쓰는 흥미를 선물해 준 것이다.


글쓰기는 여전히 나에게 과제로 남아있다. 아직 글을 쓰는 순간은 즐거움보다는 ‘수행’에 가깝다. 그런데도 나는 글쓰기를 이미지만큼이나 능숙하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지 외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미지가 만능이라고 알았던 나의 생각은 뒤로 하고, 글쓰기와 친해지려고 한다. 글쓰기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하고 싶다. 다행히 흰색 백지가 두렵지 않다. 그래픽과 이미지를 수도 없이 만들어 왔다. 이미지 제작도 흰색 바탕 위 한 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와 보내온 14년의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글쓰기 40년이 더 기대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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