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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혁 Nov 11. 2021

고부(姑婦)

1. 엄마의 몸뚱이

 하얀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침대 귀퉁이가 네모나게 환해진다.  해가 이동하고 네모가 넓어지다가 이내 할머니에게 닿는다.

 흰머리가 빛에 비친다. 하얀 이마, 백 눈썹, 흰 눈꺼풀. 할머니 얼굴 위에 한 움큼 빛이 올라타면 그제야 몸을  뒤척인다. 더듬더듬 지팡이를 찾는다.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들기니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일어나셨어요, 어머님?"

할머니를 일으켜 꾸물꾸물 함께 방 밖으로 나간다.

엄마는  다시 들어와서는 나에게,

"화장실은 좀 이따 써도 되지? 할머니 씻으시려고."

"네. 그래요."

분주한 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간다.

물소리가 푸하- 하고 난다.


 할머니가 샤워 도중 변이 나오실 것 같았는지 화장실 안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린다.

"나오실 것 같아요? 나오실 것 같아요? 기다려보세요"

나는 주저앉은 할머니를 끙끙대며 일으킬 엄마를 상상한다. 할머니의 오전. 몸을 일으키는 것, 씻는 것, 볼일을 보는 것.

 어느 날인가 바닥에 누워있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할머니와 엄마의 발이 나란히 내 눈앞에 있었다. 층층이  새겨진 주름들.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할머니 굽은 허리만큼 엄마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기우뚱기우뚱 같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두 몸뚱이가 함께 넘어져 포개어지는 상상을 했었다. 사실 할머니의 저 몸뚱이는 곧 엄마의 몸뚱이다. 엄마의 몸뚱이는 2개인 것이다. 할머니 모든 몸짓은 엄마의 힘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친 할머니는 일인 소파에 앉아 있다. 머리가 곁가지로 갈라지고 축 쳐졌다. 눈에 힘이 없고 낯빛은 유난히 창백하다. 평소에는 연세보다 고아해 보이다가도, 씻고 나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추레한 노파와 같다. 엄마는 뒷정리를 하는지 화장실 안에서 아직 물을 뿌리고 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이라도 드릴까요?"

"어어."

물을 입에 담으시곤 돌출된 턱을 앞뒤 양옆으로 우물거린다.


 엄마는 바지를 걷어붙인 채 화장실에서 나왔다.

"오늘 어디 가니? 엄마가 오늘 치과에 다녀와야 하는데.."

"그래요. 다녀오세요. 몇 시예요?"

"2시. 충치."

"그래요."

 엄마는 충치가 10개라 했다. 그걸 어떻게 그냥 두었을까. '그냥' 그냥 두었나? 할머니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아닐 거다. 충치는 할머니가 기력이 떨어지기 전부터 벌써 있었을 테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엄마부터 떠올리고, 엄마를 생각하면 할머니를 연상하는 습관이 생겼다. 엄마는 할머니를 잠시 나에게 맡긴다며 이런저런 부탁의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엄마 몸뚱이를 맡기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이마에 열이 차고 배가 고파올 때면 오전에 하던 일을 모두 널부러 놓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북적이는 식당. 갖가지 반찬. 식사를 마치면 양념이 묻은 그릇이 산더미로 주방에 쌓일 것이다. 이빨에 낀 음식물을 들쑤시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을 때에  책상 위에는 팽개쳤던 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다. 집도 마찬가지다. 뒤죽박죽 설쳐진 점심상이 싱크대 위로. 세탁을 마친 쪼글쪼글 옷 무더기가 거실 바닥에. 티브이 속에는 개그맨 아줌마가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한창이다.  그런 시간. 하루 중 가장 너저분한 시간. 2시.

 디들디들 거리는 치과의 소리. 흘려 쓴 ㄹ자처럼 누운 엄마가 입을 열면, 입동굴이 노랗게 밝혀질 것이다. 엄마는 분명 치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올 테다.  냄새를 상상한다. 그것은 분명 할머니의 냄새와 얼추 결이 비슷한 냄새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할머니를 번갈아 가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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