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지는 믿지 않기로
기록을 시작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인터넷에서 몰스킨 다이어리를 검색해서 벌써 배송 중이겠지만 칠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무엇이든 너무 비싸다. 기록의 핵심은 다이어리와 문구라는데 여기서는 소박하게 시작하기로 했다. 아이들의 책장에서 쓰다 남은 연습장과 집에서 제일 잘 써지는 볼펜을 찾았다. 남편은 자신이 다니는 대학원에서 준 멋진 다이어리를 주며 쓰라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나의 의지는 작고 소중하다. 좋은 다이어리로 기록을 시작했다가 중간에 중단하면 더 속상해질 것을 생각하며 다이어리는 밀어두었다. 편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언제든 그만두어도 나를 탓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연습장에 오늘 해야 할 일과 했던 일을 떠올리며 하나씩 적어나갔다. 여백은 꼭 채우고 싶어 져서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적어보려고 애쓴다. 미뤄두고 하지 못했던 일까지 떠올라 기어이 적어본다. 글로 적으면 꼭 실천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다. 어젯밤에는 한국의 아침 시간이어서 미뤄두었던 은행 일을 처리하고 카드까지 발급받았다.
노트 한 페이지를 둘로 나눠서 하루에 반쪽 분량을 기록했는데 이제 하루에 한 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이 카드를 잃어버리고 둘째의 도시락 가방을 새로 산 것까지 자세하게 적다 보니 기록이 자세해졌다. 기록이 세세할수록 삶이 촘촘해진 느낌이다. 오늘 날짜를 적고 그 옆에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루치의 내 삶을 더 소중하게 돌볼 수 있을 것 같다.
일기장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 누구든 볼 수 있도록 거실 책상에, 소파에 두고 언제든 떠오르는 것들을 적는다. 내 기록을 보고 남편과 아이들이 기록을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부러 노트를 펴놓기도 한다. 적다 보니 내 노트는 메모장이 되었다가 업무 수첩이 되었다가 가계부 기능까지 추가되었다. 기능이 많아져서 불편해지면 차차 정리하면 될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부렸을 텐데 기록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얼른 일어났다. 기록은 하지 못하고 아침 식사와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만드는 데 더 정성을 쏟았지만 괜찮았다. 나는 게으르지 않았고 성실했으니까.
네이버 블로그 20주년 기념 카피인 '기록이 쌓이면 뭐든 된다'는 문장이 매일 나를 설레게 한다. 내 기록은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