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조용해지다

2023. 11. 26.

드디어 연휴가 끝났다. 장장 5일간의 연휴였다. 칠레의 공휴일은 아니고 추수감사절을 이유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휴업일이었다. 첫날은 내가 아이들이 내는 소리에 예민했던 것 같고 그다음부터는 그런대로 적응했다. 도시락을 싸지 않아 아침에 알람 소리에 깨지 않아서 좋기도 했다. 하루에 세 번의 끼니를 챙기는 것은 힘들었다.


칠레는 지금 여름이다. 지난주부터 기온이 갑자기 올랐다. 불 앞에서 하루에 세 번씩 서서 일하면 가끔은 짜증이 난다. 거기다 갑작스러운 간식 주문까지 들어올 경우 몸에서 불이 난다. 오늘은 욕실에 곰팡이가 보여서 욕실청소까지 강행했다. 그래도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재미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다시 한번 더 읽고 서평 쓰기에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매일 하루가 똑같지는 않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책 읽고. 내가 발전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몰라서 답답하다. 발전이든 퇴보든 내가 딱히 세울만한 대책은 없다. 사람을 이렇게 안 만나고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관계 속에서 빠져나와 보니 관계를 객관적으로 볼 기회가 생긴다. 어떤 사람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는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관계를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어 그럭저럭 지내다 최근에야 그 관계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자고.


반대로 내가 서운하게 생각했던 사람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가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그에게 기대한 것이 있는데 채워지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나를 배려하는 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정형화하고 분류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무례한 사람, 친절한 사람, 착한 사람, 못된 사람.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면 교유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제 교유를 중단할 사람마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가 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지 내가 결정할 수 있었는데. 내 결정은 성급했다. 선을 넘은 사람을 보면 '너 선을 넘었네! 그럼 아웃이야!' 하며 마음에서 쳐냈다. 좀 더 두고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판단하면 되는데. 나는 관계를 가지치기했다.


혼자 원망하고 서운해하고 욕하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관계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거리를 둘 것인지 계속 잘 지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나에게 있고 그 기준은 '내 마음에 평화를 주는가'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섣부르게 결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연휴 내내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혼자 뒤척였다. 한국에 가면 그 사람에게 데면데면하게 굴 거야! 하며 유치한 복수도 꿈꿨다. 그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보는 것이 두려워 책으로 도망쳤다. 책을 다 읽고 아이들이 자고 집안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나는 그를 다시 마음속에서 꺼내볼 용기가 생겼다. 그래, 우리 다시 가 보자! 대신 나는 너에게 거리를 둘 거야. 너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더라도 금방 알아챌 거야. 네가 나에 대한 존중이 가능하도록 나는 너에게 가끔 신호를 보낼게. 너도 얼른 눈치 챙겨!


사진: Pixabay, Vu Quang Namm님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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