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무르다 가는 것

2023. 11. 23.

칠레생활의 노하우가 계속 쌓인다. 카드 할인으로 쇼핑몰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저렴하게 외식하는 방법과 집 근처에 있는 가성비가 좋은 피자 전문점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재래시장에 다니다가 집에서 가까운 상설 시장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조금씩 사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체리는 언제쯤 나오고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인지 알고 있다. 마트에 있는 쌀 중 어떤 것이 한국에서 먹던 맛과 가까운 지 이제는 안다.


칠레살이가 점점 익숙해지고 편해질수록 한국으로 돌아갈 날은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1년 10개월만 살기로 계획하고 왔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좁은 집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돌아갈 때 짐을 처분하는 데 애를 먹을까 봐 본의 아니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 칠레에 오기 전, 한국에 있는 짐을 정리하고 집을 옮기면서 내가 쓰레기를 안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는 언제든 떠나기 쉽도록 생필품과 식재료만 구입한다. 옷과 책은 사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 잠시만 있다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좀 참을 수 있고 떠날 때를 대비하여 최소한의 짐으로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4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면서 내 책상을 정리하며 버렸던 물건을 보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절대로 물건을 많이 두지 않겠다고. 텀블러와 수건 정도만 책상에 두고 근무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떠날 때는 언제나 짐이 종이상자 한가득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뭐든 좀 가볍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가볍게 대한다는 것은 애정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과한 애정과 열정을 쏟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는 집도 일도 직장에도 너무 과하게 몰입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일할 것처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특히 직장은 내가 아니어도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고 잘만 돌아가는 곳인데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게 다녔다.


이곳에서는 인간관계가 가벼워졌다. 누구를 깊게 사귈 기회도 없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거절하기 어려워 억지로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관계가 나빠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용기도 생겼다. 선을 넘는 사람은 안 보면 된다. 이곳을 떠나는 날까지 적당히 친절하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한국으로 가면 된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갖추기 힘든 태도다. 한국은 관계와 일 등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이 무겁고 버거웠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 짐은 가볍게, 관계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일에 대한 과한 열정을 품지 않으면서. 외로움과 고립감을 구분하면서 내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과만 가깝게 지내고 싶다. 이곳에서 살던 노하우를 잊지 않고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태도로 살고 싶다. 내게 온 물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것들이 들고 나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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