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말해져야 한다.
며칠 전, 공무원재해보상연금위원회로부터 등기가 왔다는 메시지가 왔다. 언니에게 우편물을 대신 받아달라고 했다. 나는 등기 내용이 궁금해서 공무원연금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심사결과에 '인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용?
내가 아는 그 단어가 맞나? 그럼 공무상 요양 기간 연장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다는 뜻인데.
4월에 접수했던 재심 청구 결과가 11월이 되어서야 나왔다. 기다린 자만이 얻는 행운인 건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니가 우편물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줄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결정서를 읽고 또 읽었다. 진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진 것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는 원하는 결과를 얻고도 기쁘지 않았다. 이상했다. 기대하지 않아서인지 시간이 오래 지나서인지 잘 모르겠다.
재심 청구가 인용되었다고 크게 얻는 이익은 없다. 휴직명에 '공무상' 단어 하나만 추가될 뿐. 누가 잘했다고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학교의 관리자는 공무상 요양 승인이 났다고 했을 때 불편해했다. 자기들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요양 승인을 받은 교사가 나온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쓴 거지. 허무했다.
만약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면 속상했겠지. 억울하다고.
칠레로 오기 직전까지 재심 청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난 포기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는 잊어버렸다. 도착하고 한 달 동안은 인터넷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잊고 싶었다. 유쾌하지도 않은 기억을 여기서까지 꺼내보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꺼내서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칠레에서는 다른 기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 않았다.
재심을 청구할 때 써서 제출했던 '심사청구 이유'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글에는 고통을 말하고 상처를 받더라도 고통은 말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때 나는 말하지 않고 덜 고통받는 것보다 말하고 더 고통받는 것을 택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더라도.
결정서를 읽으며 작가 은유가 떠올랐다. 은유는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세상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나의 언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언어로 고통을 말했고 누군가 응답해주었다. 마치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의 특권을 맛본 것 같아 씁쓸했다.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의 고통은 누가 응답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