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에서 회사 이름을 지우자, 진공이 나를 집어삼켰다

2023년 11월 1일: 독립의 날

2023년 11월 1일, 나는 더피알이라는 회사의 공동 대표 명함을 내려놓고, '메시지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책상 위에는 '메시지하우스'라는 사업자 등록증이 놓여 있었다. 종이 한 장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 한 장이 대체한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가 벗어던진 것은 조직의 시스템이었고, 동료의 네트워크였고, 기존 고객의 흐름이었고, "그래서 지금은 어디 소속이세요?"라는 질문에 즉답할 수 있게 해주던 소속의 문법이었다.


밖에서는 이 순간을 "박수칠 때 떠나는 멋진 엑싯"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2023년의 공기는 불경기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업계 동료와 선후배들의 질문은 축하보다 우려에 가까웠다. "이 시국에 굳이 대표 타이틀까지 버리고 나갈 이유가 있나요?" "왜 굳이 광야로 나가려 합니까?" 그들의 질문은 정당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R업계에서 '소속'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신뢰를 번역해주는 강력한 문법이다. 회사 로고는 나를 더 빨리 이해시키고, 더 쉽게 믿게 만들고, 더 편하게 거래하게 해준다.


그런데도 내가 이 결정을 밀어붙인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탈출'이 아니라 '졸업'을 원했다. 조직이 언젠가 내려줄 '퇴직'이라는 선고를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회사원이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독립 기업'이라는 업으로 정체성을 옮겨 심는 방식. 만 50세라는 숫자가 내 삶의 문턱을 넘기 전에, 나는 성벽 밖에서 내 이름의 무게로 다시 살아보기로 했다.



세 번의 독립이 완성되기까지

배경정보 차원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 한가지를 공유하고 싶다. 내 독립은 한 번에 완성되는 서사가 아니었다.


내게는 세 번의 독립이 있었다. 2010년 만 37세에 소셜링크를 창업했고, 2022년 만 48세에 웨버샌드윅을 퇴사했고, 2023년 만 50세에 메시지하우스를 독립했다.


첫 번째는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두 번째는 값비싼 데이터였고, 세 번째는 설계된 졸업이었다. 돌이켜보면, 첫 번째 독립부터 완성된 독립까지 13년이 걸렸다.



첫 독립은 내게 '가능성의 증명'이었다

시간을 더 멀리 돌려보자. 2010년, 나는 37세였다. 드림 커뮤니케이션즈, 에델만 코리아 등 PR 에이전시에서 10년을 일했다.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던 시기였고, 나는 그 파도를 먼저 타보기로 했다. '소셜링크'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16명의 팀을 꾸렸고, 새로운 언어로 시장과 대화했다. 클라이언트는 늘었고, 매출은 올랐고, 팀은 확장됐다.


하지만 2012년,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소셜링크를 웨버샌드윅과 합류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실패한 독립'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리 봤다. 첫 독립은 내게 가능성을 증명했다. 나는 조직 밖에서도 살 수 있었고, 독립 기업을 만들 수 있었고, 팀을 꾸리고 시장과 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보 대표에게는 지속적인 성장의 어려움이 느껴졌다. 10명이 넘는 조직을 어떻게 100명 규모로 키우는가? 개인의 역량을 어떻게 조직의 자산으로 전환하는가? 프로젝트를 어떻게 반복 가능한 프로세스로 만드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나는 더 큰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웨버샌드윅이라는 글로벌 PR 회사에 재입학했다. 12명의 소셜링크 팀원들과 함께. 이것은 나에게 실패가 아니라 전략적 복귀였다. 더 크게 배우고, 더 정교하게 시스템을 익히고, 더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2012-2022: 웨버샌드윅, 독립 기업 근육을 키운 약 10년

웨버샌드윅에서의 10년은 단순한 '직장 생활'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소셜링크 팀원 12명과 웨버샌드윅 기존 팀 16명, 총 28명으로 시작해 조직을 100명 규모로 성장시키는 경험을 했다. 글로벌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학습했고, 부사장에서 수석 부사장, 그리고 지사장까지 올라갔다. 2019년 6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약 1년 9개월 동안 지사장으로 일했다. 이 10년은 독립 기업 CEO가 되기 위한 근육을 단련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10년은 내가 만 37세에 증명한 '가능성'을 '시스템'으로 바꾸는 시간이었다. 소셜링크에서 배운 것은 "나는 독립할 수 있다"였고, 웨버샌드윅에서 배운 것은 "나는 어떻게 독립해야 하는가"였다. 하지만 2022년 초, 나는 다시 한번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번아웃이 이유였다.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 독립이다.



2022년 2월: 두 번째 독립은 값비싼 '데이터'

2022년 2월, 나는 웨버샌드윅 지사장직을 내려놓고 조직 밖으로 나왔다. 번아웃이라는 현실 앞에서 삶의 속도와 방향을 재조정해야 했고, 그 결단은 나에게 필요했다. 나는 이 선택을 지금도 '완전히 실패한 독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독립 기업가로 완전히 전환하기 전에 반드시 치러야 했던, 거친 예행 연습에 가까웠다.


다만 예행연습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조직이라는 울타리가 걷히자, 내가 '내 실력'이라고 믿었던 것들 중 일부가 사실은 조직의 신뢰와 시스템, 간판의 번역력 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경력이 시장에서 현금으로 바뀌는 경로가 사라진 것이다. 전화기의 침묵은 낯설었고, 질문의 방식은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 계세요?"가 아니라,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해주실 수 있나요?"


그때 나는 한 가지를 뼈에 새겼다. 독립은 "나가면 생기는 자유"가 아니라, "나가기 전에 구축해야 하는 구조"라는 것.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 나를 대신해 말해주던 문법이 사라진다는 것. 두 번째 독립은 내게 자존심을 깎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준 값비싼 데이터였다. 첫 독립이 "가능성의 증명"이었다면, 두 번째 독립은 "시스템의 부재 확인"이었다. 이 데이터가 없었다면, 2023년의 나는 같은 실수를 세 번째로 반복했을 것이다.



더피알 1.5년: 재취업이 아니라 ‘인큐베이팅’

웨버샌드윅 퇴사 4개월 후, 나는 더피알로 향했다. 그 선택은 후퇴가 아니라 재설계였다. 더피알에서의 1년 반은 '다시 월급 받는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자발적 유배이자, 인큐베이팅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독립 기업 이중대를 세우기 위해, 다시 한번 조직의 시스템을 빌려 내 시스템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고용된 월급쟁이'로 정의하지 않았다. 대신 회사를 나의 '첫 번째 고객'이라 생각하며 일했다. 조직의 자원을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실험했고, 고객의 반응을 관찰했고, 후배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운영했고, "나라는 기업이 시장에서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가"를 설계했다. 매일 같이 내 머릿속을 채운 질문은 이것이었다. "시장은 지금, 나라는 독립 기업에게 어떤 솔루션을 원하는가?" "내 경력은 어디서부터 훈장이고, 어디부터 자산인가?" "내가 팔아야 하는 건 노동인가, 시스템인가?"


그리고 그 질문이 쌓이던 시기에, 또 하나의 해일이 밀려왔다.

ChatGPT의 등장이다.

AI디지털참모.jpg

AI는 포식자가 아니라, 베테랑을 증폭시키는 ‘디지털 참모’

사람들은 AI를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 포식자'로 봤다. 그 전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많은 일이 재편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재편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 AI는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2010년, 소셜미디어라는 파도를 타고 나의 첫 회사 '소셜링크'를 시작했던 사람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시장은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먼저 붙잡은 사람이 항상 기회를 가져간다. 나는 그 역할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감이 왔다.


AI는 베테랑의 경험을 낡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베테랑의 숙련을 재가공 가능한 자산으로 바꾸는 기술이 될 수 있다. 나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디지털 참모'로 임명했다. AI는 회의 브리핑을 정리했고, 메시지를 정렬했고, 제안서를 구조화했고, 리스크를 점검했다. 내가 가진 경험과 직관을 "한 번 쓰고 끝나는 노동"으로 두지 않고, "다시 꺼내 쓰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연습을 시작했다. 더피알에서 받는 월급은 어느 순간, 내 독립을 위한 R&D 비용처럼 느껴졌다. 조직 안에서 먼저 독립 기업 CEO 근육을 키운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11월 1일.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설계된 졸업이었다.



진공을 채우는 것은 회사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사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공은 차갑게 찾아왔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울려대던 전화기는 침묵했고, 검색창에 ‘메시지하우스’를 치면 결과는 ‘0’이었다. 20년 넘게 쌓아온 시간이 송두리째 증발한 듯한 묘한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명확했다. 그동안 나를 채우고있던 것은 ‘나의 가치’가 아니라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독립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은, 회사가 해주던 번역을 내가 직접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중대”라는 이름이 시장에서 다시 호출되도록, 신호를 쌓아야 했다.



진공을 채운 것은 '신호의 설계'

진공을 채우기 위해, 내가 붙잡은 동아줄은 거창한 사업 계획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PR 전문가답게, 나는 신호의 설게부터 시잭했다.


디지털 광장 - ‘링크드인’에 내 생각을 올렸다. 프로젝트가 없었기에 나는 더 독하게 글을 썼다. AI와 메시징 전략이 결합된 관점과 사례와 팁을 매일같이 시장에 던졌다.

“나는 아직 여기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전보다 더 정교해졌다.”


그 신호는 서서히 시장의 레이더에 걸렸다. ‘커피챗’이 늘었고, 브릿지 기간에 진심으로 대화했던 후배들이 내 전문성을 보증하며 잠재 고객과 나를 연결해주었다. ‘약한 유대’가 혈관이 되어, 독립 기업인 내게 새로운 순환계를 만들어줬다.


내가 잃은 것은 소속의 문법이었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이름으로 작동하는 시장의 반응이었다.



명함 없는 월요일은 끝이 아니라, 가장 깨끗한 시작이다.

초기 독립 기업은 외롭다. 그 외로움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외로움을 “나약함의 증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의 부품이 아니라 진정한 ‘비즈니스의 주체’로 우뚝 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침묵의 숙성 시간’이다.


명함에서 회사 이름을 지우고, 오직 당신의 이름 석 자만 남았을 때 찾아오는 그 거대한 진공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진공은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설계실이다.

회사의 이름이 빠진 자리에서 당신의 사유와 시스템뿐이고, 그 둘이야말로 독립 기업을 다시 세우는 유일한 재료다.



세 번의 독립이 알려준 것

돌이켜보면, 내 세 번의 독립은 각각 다른 것을 가르쳐줬다. 만 37세, 2010년 소셜링크는 "나는 독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다. 만 48세, 2022년 웨버샌드윅 퇴사는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만 50세, 2023년 메시지하우스는 "나는 어떻게 신호를 보낼 것인가"라는 실행의 단계였다. 세 번의 독립이 없었다면, 지금의 메시지하우스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명함 없는 월요일"을 맞이하고 있다면 이렇게 질문해보길 바란다. "이 진공을 채울 나의 신호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졸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수, 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당신의 명함에는 무엇이 쓰여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