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한 이성과 두 번째로 만나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문득 네 생각이 났다.
너를 바래다주던 늦은 밤의 서늘한 공기가 익숙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자꾸만 너의 흔적을 찾아 비교하려 드는 나의 무례함 때문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오늘은 그저, 이유 없이 떠오르는 네 생각을 마냥 참기만 하는 게 어려운 날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만났던 사람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상대였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이 출중했고 성격까지 멋지고 좋은 사람이었다. 주선해준 친구가 왜 그렇게 칭찬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와 비슷한 점도 많았고 대화도 잘 통했다.
그에 비해 너는 나와 많이 달랐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감성적인 너와 지극히 이성적이고 부정적인 나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다. 뭐든지 설명하고 이해하려 드는 나와, 복잡한 게 싫어 대충 웃음으로 때우려 들던 네가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미로 잘 헤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랐기에 나는 매일 서로 맞물린, 하지만 어긋난 톱니바퀴를 조금씩 부숴가며 전진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는 누가 봐도 ‘헤어지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는 이별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서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면서. 그래서 나름대로 ‘헤어지는 방식은 좋았다’.
결국 헤어짐이 마땅했고,
그 방식이 적당했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시간들에 대해 나 혼자 평가를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아마 너도 비슷하게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뭐, 어찌 됐든. 너와의 이별 덕분에 오늘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도 할 수 있어서 너에게 고마운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오늘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지는 않을 거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사람을 사람으로 잊는다는 건 지우개 역할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싶어서이다.
언제부터 상대에게 예의가 넘쳤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에게 이건 우리 관계에 예의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예의가 있듯, 소중한 추억에 대해서도 일종의 배려가 필요하니까. 추억이 추억으로써 잘 기능할 수 있도록, 가슴 한구석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
네가 항상 우려하던 것처럼, 나는 여전히 이렇게 피곤하게 산다. 아무래도 나는 당분간 우리의 시절을 과거로 흘려보낼 수도, 새로운 누군가와 또 다른 우리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에게 구질구질한 연락은 절대 가지 않을 테니까. 감정에 못 이겨 취해서 연락하거나 어느 날 뜬금없이 집 앞으로 찾아간다거나 하는 일들은 내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 범주에 있다는 걸 너도 잘 알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은 이성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는 너와의 추억들을 소모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의 일상 곳곳에 흩뿌려진 기억의 파편들을 수거하며 이렇게 혼자 궁상떠는 시간 말이다. 딱 오늘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