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용어이자 화엄경의 중심사상.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와 관련되어 자주 인용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어찌 보면 뻔하디 뻔한 의미의 다섯 음절.
언제부터 이 어구를 알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주워 들었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현재 내 인생의 좌우명이자 내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되뇌는 주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무슨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 또한, 꽤 오래된 일임에도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부모님이 비교적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아버지는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두 분의 인생에서도, 자식인 나의 삶에서도 너무나 빨리 찾아온 이별이었고, 시기적으로도 나빠 그것을 수용하고 감내하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가 떠나셨을 때는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건재했기에 그 안에서 어떻게든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셨을 때는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를 가려줄 우산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거칠게 나를 때리는 장대비 앞에 맨 몸뚱이를 드러낸 채 그저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볼 뿐, 다른 도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일주일 만에 부대에 복귀한 군바리의 처절한 기억에서부터 말이다.
그때의 나는 참 처량했다. 신병 위로휴가에 일병 정기휴가까지 몽땅 끌어다 써버린, 자대 배치 3주 차의 이등병이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애처롭기 그지없다.
당시 소대장은 내 상황이 안쓰러웠는지 전역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주었고(물론 여의치 않았다), 일부 선임병들도 나를 위로하고자 노력해 주었다. 고마운 배려였지만, 감사를 표할 심적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복귀일부터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면 두어 가지의 거대한 질문이 나를 짓눌렀다. 고된 일과로 몹시 피곤했음에도, 잠들기는커녕 답답한 마음에 편히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부모님이라는 생(生)의 뿌리를 잃어버린 나는 줄기와 가지만 남아 휘청이는 나무에 불과했다. 뿌리가 나를 지지할 동안에는 하지 않던 생각들이, 들지 않던 의심들이 이때만 기다렸던 것처럼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합당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목을 조르는 하루하루가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더 피폐해져 갔다. 어지러운 정신이 육체의 휴식을 방해했고, 건강하지 못한 육체는 정신의 병듦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급기야 내가 군대라는 집단을 버텨내기 위해 쓰고 있던 가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까지 벗겨질 것만 같았다.
악순환의 반복. 이러다가는 사달이 나겠구나 싶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어떤 방법과 내용으로든. 그래야만 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살얼음판이었다. 얼음을 깨부수는 자도, 그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자도, 둘 다 나 자신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귀일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멀어졌지만 여전히 나는 이등병이던 어느 날. 좀비와 다름없이 지내다 기어이 사고를 쳤다. 하극상이었다.
위병소에서 새벽 근무를 서던 중, 어린 선임병의 훈계가 그날따라 고깝게 들렸던 것 같다. 참지 못해 화를 냈고, 당황한 상대는 자리를 피했다.
사실 내가 정확히 왜 그랬는지,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저, 그때의 나는 이미 육체와 정신 모두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는 것.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쌓아두는 일이 힘에 부쳐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 그러니 선임병 입장에서는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폭탄을 잘못 건드린 셈이었다.
다행히 당직사관이던 소대장이 일을 잘 무마시켰고, 물리적 접촉은 크게 없었기에 영창을 가는 일은 피했다. 하지만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따로 있었다. 더 안 좋은,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받은 적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결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재수 없이 똥을 밟은 선임병에게는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어쨌든,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참 빨리도 정신을 차린 것이다.
첫째, 이러다가는 십중팔구 더 큰 사고로 이어진다.
둘째, 이런 꼴로 망가지는 건 갚지도 못할 불효다.
지극히 1차원적이고도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혼자만의 시간이 줄어들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를 망치고 있던 건 나 자신, 나의 마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일체유심조’가 불현듯 뇌리를 스친 것도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노력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조금만 더 버텨보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몸보다는 마음에 문제가 있었기에, 썩어빠진 정신을 뜯어고치고자 최선을 다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그득히 들어찬 오물을 비우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곳곳에 엉겨 붙은 비관과 염세를 단숨에 털어내고 싶었으나,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운 다음 채우는 것 대신, 밀어내는 것을 택했다.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고의 물꼬가 트일 때마다 긍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생각들을 떠올렸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실만한 방향을 고민하고,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누나를 기억하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와 전역 후의 나날들을 기약하며. 조금씩 천천히,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으니 억지로 꾸역꾸역, 생각을 생각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훈련‘이었다. 나로서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육체를 단련하는 것과는 비할 수 없이 어려웠기에,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으로 ‘내가 조금 괜찮아졌다’고 느낀 시점이 상병 초쯤이었으니, 최소 8개월 이상은 걸렸던 것 같다.
시작이 반이라고, 변화를 느낀 후부터는 회복이 더욱 빨라졌다.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전환이 예전만큼 어렵지 않았고, 조금 더 건설적인 생각과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신이 깨어있는 동안에는 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어느새 나 자신을 지배하는 사고의 기조가 어느 정도 달라졌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무사히 군생활을 마무리했다. 전역 후에도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덮쳐왔지만, 가장 힘들었던 1년, 쉴 새 없이 나 자신과 싸워야 했던 시간들을 거쳐왔기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마음이 만들어낸 망상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며, 지금까지 살아내고 버텨내는 중이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희극과 비극을 결정하는 주체는 상황이나 다른 사람 따위가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부모님과의 이른 이별과 그로 인해 닥친 풍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 매일을 살고 살아내는 방법까지. ‘일체유심조‘라는 어구를 가슴에 새기게 된 것 역시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종교도 없다. 뭐든지 직접 경험한 것 외에는 쉽게 따르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얻은 좌우명은,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껴가며 얻은 깨달음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일체유심조, 다섯 글자가 가진 강력한 힘과 가치를 믿는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모두가 알고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해 본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마음의 흐름도 물의 흐름과 마찬가지라, 흘러가는 방향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것을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하지만, 의지가 있다면 분명히 가능한 일이라고. 그래서 만약 누군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언젠가는 상황과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출 수 있을 거라고.
일체유심조를 좌우명으로 삼은 나에게도, 평생의 숙제와 같은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