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영 Nov 10. 2024

오늘은 영국 현충일, 양귀비꽃에 얽힌 통합과 분열

다문화 사회의 해결 과제

《개양귀비 들판에서》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적을 이어받으라.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이제 그대의 것이니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 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하여도.

— 존 맥크래(1872~1918)


11월 10일 오늘은 영국 현충일이다. 우리말로는 '영령(英靈) 기념일'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이날은 영국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서도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전몰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거행된다. 행사 참여를 위해 런던의 화이트홀(Whitehall)을 따라 집결한 참전용사와 현역 군인, 시민들은 오전 11시가 되면 빅벤(Big Ben)의 타종에 맞춰 2분간 묵념한다. 이 묵념 행사는 전국적으로 펼쳐진다. 묵념이 끝나면 국왕 찰스 3세가 위령탑(the Cenotaph)에 화환을 헌화하고, 정계 지도자와 영연방 사절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전몰자들을 위한 기도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영국 국가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구하소서(God Save the King)》가 연주된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나면 참전용사, 현역 군인,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벌이는데 그들은 위령탑을 지나갈 때 탑을 향해 경례한다.


2023년 11월 12일에 거행된 영국 현충일 추모 행사 장면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제1차세계대전의 총성이 1918년 11월 11일에 마침내 멎었고, 영국인들은 이 전쟁에서 산화한 자국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듬해인 1919년 11월 11일을 종전기념일(Armistice Day)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자연스레 이날의 추모 대상자에는 더 많은 영혼이 추가되었다. 기독교의 주일(主日)인 일요일에 교회에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전통이 생기면서 1956년에는 11월 둘째 주 일요일이 'Remembrance Sunday'로 자리 잡고 원래의 종전기념일을 대체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 제1차세계대전 연합국들은 여전히 11월 11일을 종전기념일로 기념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미국은 1926년부터 매년 11월 11일을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지정하여 기념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현충일이 되면 영국 사람들은 붉은색 양귀비꽃 모형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단다. 이 별난 전통은 캐나다 군인으로서 제1차세계대전에 영연방군으로 참전한 존 맥크래(John McCrae) 중령이 쓴 시(詩)에서 기인한다. 당시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적과의 교전 중에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가 들판에서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하는 와중에도 개양귀비 꽃이 피어났는데, 이를 목도하고 상념에 빠진 존 맥크래 중령이 1915년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발표하여 선풍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그리하여 양귀비꽃을 통해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전통이 탄생한 것이다. 영국의 재향군인 후원 단체인 영국 재향군인회(Royal British Legion) 양귀비꽃 배지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참전용사와 유가족들에게 전달한다.




그렇다고 현충일이 통합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은 현충일 추모 행사에서 소외된 소수 집단을 끌어안아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양차 세계대전 때 영국령 인도 육군(British Indian Army)에 배속되어 유니언 잭(Union Jack) 아래에서 싸웠던 무슬림이 40만 명이나 되는데, 오늘날 이들의 희생에 대해서 아는 영국인은 많지 않다. 영국의 중립적 성향의 싱크탱크인 브리티시 퓨쳐(British Future)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슬림들의 참전에 대해서 아는 영국 국민은 20%에 불과하고, 참전 규모까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영국 현충일은 양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영국군과 영연방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모든 전투에서 사망한 전몰자를 기리는 날인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참전한 영국군의 넋을 기리는 것은 무슬림 영국 국민에게 아무래도 꺼림직한 일일 터이다. 특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에서 탈출하여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영국에 정착한 난민 출신 영국인이라면 이날을 곱게 바라보기 힘들지 않을까? 게다가 아랍인들만 현충일에 불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요구하는 분리파 지지자들은 영국 현충일을 자신들을 짓밟아 온 잉글랜드 사람들을 위한 국경일이라고 여기고 양귀비꽃 배지를 달지 않으려한다. 현충일이 반드시 국민 통합의 날로만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민족 국가 영국이 떠안은 사회 통합의 과제는 이렇게 현충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참고자료:


What does it mean to wear a poppy today?. (2024년11월7일). The Economist. https://www.economist.com/britain/2024/11/07/what-does-it-mean-to-wear-a-poppy-today

Cunningham, J. M. (2024년11월9일). Remembrance Sunday. Encyclop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topic/Remembrance-Sunday

APPG British Muslim. (2022년11월13일). The Muslim Contribution to Britain's War Efforts Needs to be Better Remembered. https://appgbritishmuslims.org/news/2022/11/13/the-muslim-contribution-to-britains-war-efforts-need-be-remembere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