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종교부 고위 공무원들이 귀국하기 전에 기념품을 좀 사야겠답니다. 아내와 저는 이들을 명동 지하상가로 안내했습니다. 이 사람들 알고 보니 흥정의 달인이더군요. 상인이 한 제품에 1만 2,000원을 부르자, 그들은 8,000원에 주면 3개를 사겠다며 시작부터 가격을 대폭 깎는 대담한 흥정을 시작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흥정 방식에 상인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가격을 놓고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고 저는 중간에서 양쪽으로 오가는 말을 전달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그 가격 아니면 안 사겠다고 손님들이 돌아서려고 하니까 상인은 하나도 못 파는 것보단 그 가격에라도 여러 개 파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참, 이 사람들 왜들 그래?”라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결국 그 가격에 물건을 내주기로 합니다.
상인과의 흥정 전쟁에서 승리하여 의기양양해진 종교부 공무원들은 양말을 파는 다른 가게에 멈춰서서 또 다른 목표물을 봤다는 듯 이것저것 한참을 만지작거립니다. 그러다 뭔가 재미난 걸 봤다며제게 손짓합니다.
"태극기가 양말이 됐네.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거야?"
인도네시아 땅에서 성스러운 국기 '상 사카 메라 뿌띠(Sang Saka Merah Puthi)'를 이렇게 양말로 만들어 팔았다가는 당장 경찰에 잡혀갈 겁니다. 인도네시아는 국기뿐만 아니라, 국가(國歌)인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 국장(國章)인 '가루다 빤짜실라(Garuda Pancasila)'를 비롯한 국가 상징물을 모독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나라입니다.
"국기를 불태운 것도 아니고 양말로 만든 게 뭐 어때서"라고 우리식대로 쉽게 생각하면 큰코다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 헌법 제35조와 제36조에는 국기, 국가, 국어, 국장이 명시되어 있고, 국가상징물에관한법률(Undang-Undang tentang Lambang Negara) 제24조는 국기를 파손하고 찢는 행위, 밟는 행위, 소각하는 행위, 모독하거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 국기를 오욕(汚辱)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기타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기를 상업 광고물이나 홍보물로 사용하는 행위, 국기 위에 글씨, 숫자를 적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 행위, 그리고 상품 포장이나 마개로 쓰는 행위도 금지됩니다. 벽에 그려진 국장에 발길질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경찰서에 붙들려가는 사례도 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사람이나 현지에서 사업을 하려는 이들은 국가 상징물을 부주의하게 다루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우리가 태극기를 다룰 때 무심코 하는 행동을 현지에서 인도네시아 국기에 했다가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큰 문화적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도네시아 국기를 냄새나는 발가락 싸개로 만든다는 건 이 나라에 몇 년 살아본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국가 상징물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가 왜 이렇게 현격한 차이를 보일까요? 다민족, 다종교 사회인 인도네시아에서 국가 상징물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러한 상징물에 대한 존중이 국가의 통합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독립 후 '한국어를 말하는 한민족의 나라'라는 단일민족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나라를 건설했기 때문에 민족이나 종교가 국가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로는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념 차이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나, 대한민국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지방 세력이나 종교 단체의 준동이라는 갈등을 겪지 않고 발전했습니다. 그 덕분에 태극기는 민족적 자부심을 상징하는 정도로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반텐(Banten)주 땅으랑(Tangerang) 소재 경찰서 주차장에서 국기게양식이 거행되는 모습을 호텔 객실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적게 잡아도 300개가 넘는 민족이 함께 사는 다민족 국가로 각각의 민족은 고유의 언어, 문화,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분열의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지요. 2000년대까지만 해도 아체(Aceh)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며 무장 단체들이 정부군과 싸웠고, 파푸아섬에서는 지금도 분리주의 단체가 납치와 살인 등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국가상징물은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하나의 공통된 정체성을 제공하여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접착제로서 기능합니다. 그런 국가상징물을 모욕하는 행위는 통합된 국가공동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지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한국은 정치적으로 급격한 민주화를 경험했습니다. 여행사들이 봉황과 무궁화가 들어간 대통령 상징물을 관광버스에 새겨놓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과거에 권위적으로 관리되었던 국가 상징물들이 점차 더 자유롭고 유연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군(軍)과 경찰 등 국가기관이 누리는 힘과 권위가 아직 제법 강하게 살아있습니다. 따라서국기와 같은 국가 상징물에 대한 태도는 각 나라의 정치적 역사, 사회적 경험, 그리고 국민의 감수성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이러한 차이를 존중하는 자세로 외국인들과 교류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