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을 만나 뵈러 아내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모교(母校)이자 제가 아내를 처음 만난 장소였던 인도네시아 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교정에서 저희는 추억을 되새기며 산책하던 중이었는데, 근처 중학교에서 통역 봉사를 부탁받게 되었죠.
우리나라 강원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해외교육봉사 활동을 위해 데뽁(Depok)에 위치한 움물 꾸로 중학교를 찾았는데, 그곳 선생님 중 한 분이 아내에게 개회식 통역을 부탁한 겁니다. 아내는 국비 장학생으로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강원도 교육청이 인도네시아 교육부 공무원들을 연수 프로그램에 초청했을 때 행사 통역을 맡은 적이 있어 이런 인연이 생겼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인도네시아 교육부 청사를 방문해, 그곳의 높으신 분께 차 대접을 받으며 교육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인도네시아 교육문화연구기술부 청사
저희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강당에 마련된 개회식장으로 향했는데, 이미 정복(正服)을 차려입은 데뽁 시장과 교육 부서 공무원들이 와 있었습니다. 이동식 깃대에는 인도네시아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고, 이곳에서는 늘 그렇듯이 행사에 앞서 인도네시아 국가 연주와 제창이 이어졌습니다. 인도네시아는 공적 행사 때마다 국민의례를 거행하라는 규정이 법률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도네시아 국기에 경의를 표하며,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경쾌한 가락으로 흘러나오는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 위대한 인도네시아라는 뜻)를 끝까지 부르는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국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애국가가 이어졌습니다. 주최 측에서 애국가까지 준비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모두 놀랐습니다. 이 행사를 나름 국제 행사로 거창하게 준비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가 끝나면 반주가 멈출 줄 알았는데, 주최 측에서 4절까지 부를 수 있는 긴 애국가 음원을 준비해 둔 모양입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애국가를 4절까지 언제 마지막으로 불러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자기 나라 국가를 제대로 못 부르면 정말 망신살 뻗칠 것 같았죠. 그래도 강원도 최고의 수재(秀才)들답게,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라는 4절 가사도 무난하게 기억해 내며 끝까지 잘 부르더군요.
국가 연주를 통해 일국은 주권을 주장하면서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동시에 타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외국에서 대통령이나 국왕 등 국가 원수가 국빈으로 방문하면, 접수국의 국가 원수가 최고의 의전으로 손님을 맞이합니다. 이때 방문국의 국가가 먼저 연주되고, 그다음에 접수국의 국가가 연주됩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환영식을 넘어, 접수국이 자신이 주권 국가임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손님 국가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엄숙한 의식입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수반이 우리나라에 온다면, 이러한 의전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팔레스타인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보유한 국가로 공식 인정되지 않은 경우, 국가적 상징을 통한 의례에서 차이가 발생하며, 이는 외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2018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창덕궁에서 의전을 베풀었다.
또한, 국가 연주와 노래 부르기에는 '국민을 만드는' 중요한 사회화 기능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국가를 부르며 자신이 속한 민족 집단과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집니다. 더 나아가, 국가대항전이 아닌 프로야구 경기와 같은 일상적인 스포츠 이벤트에서도 국민의례를 통해 국가의 상징을 되새기는 것은, 날마다 민족적 일체감을 표출하고 고양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는 국민 개개인에게 민족적 집단 행동에 대한 열의를 고취하고,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기능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은 국가적 단결을 강화하고, 국민들이 사회 내에서 공동의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사회화 기제로 작용합니다.
저는 움물 꾸로 중학교 강당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각자의 국가를 부르는 광경을 보며, 국가 연주가 지닌 마법 같은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개인 자격으로 행사에 참여했을 뿐인데도, 순간적으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국가 연주는 '내가 누구인지'를 일깨워 주며,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특별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상징적 효과를 발휘합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수카르노
그리고,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머르데카(merdeka, 독립이라는 뜻), 머르데카'라는 후렴을 부를 때, 제 귀에는 마치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던 수카르노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 속에 담긴 독립과 자부심의 역사가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국가가 단순한 노래가 아닌, 그 나라의 투쟁과 희망을 담은 목소리로 다가왔던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