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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Sep 28. 2024

'인도네시아 라야'와 청년의 맹세

위대한 인도네시아라는 접착제

주심이 휘슬을 불기도 전에 축구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체육의 성지, 글로라 붕 카르노(Gelora Bung Karno) 경기장을 가득 메운 7만 관중은 곡조가 경쾌한 국가(國歌)인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를 한목소리로 열창합니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인도네시아 축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면서 팬들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었습니다. 이제 본선 진출 티켓이 흐릿하게나마 눈에 들어옵니다.


동남아시아 축구 최강자라던 태국이 떨어진 가운데 인도네시아 홀로 살아남았으니 자부심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매번 지기만 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원정길에서 귀중한 승점 1점을 따왔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뭔가 달라 보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호주와의 역사적인 홈경기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되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국가 연주 행사 때 붉은색-흰색 국기를 흔들며 떼창으로 상대의 기를 죽일 인도네시아 관중들이 연출할 웅장한 광경을 저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시간에 맞춰 중계방송 화면을 제공하는 라이브 스트리밍에 접속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방송사들이 제공하는 하이라이트 동영상에서 국가 연주 장면은 대개 싹둑 잘려 나가서 없더라고요.


흥분의 도가니 속에 갇혀 심리적 압박을 강하게 받았을 호주 선수들은 FIFA 랭킹 130위의 한 수 아래 인도네시아 팀에 초반 10분 동안 주도권을 내주며 고전했습니다. 파도가 부서지고 나서 호주 선수들이 정신을 차린 듯 흐름을 되찾고 일방적인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국 인도네시아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첫 경기 바레인 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승리가 간절했던 호주 선수들은 승점 1점만을 챙겨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경기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교육부 청사에서 바라본 글로라 붕 카르노 경기장




Indonesia, tanah airku
Tanah tumpah darahku
Di sanalah aku berdiri
Jadi pandu ibuku

Indonesia, kebangsaanku
Bangsa dan tanah airku
Marilah kita berseru
Indonesia bersatu!

Hiduplah tanahku, hiduplah negeriku
Bangsaku, rakyatku, semuanya
Bangunlah jiwanya, bangunlah badannya
Untuk Indonesia Raya

Ulangan:
Indonesia Raya, merdeka! Merdeka!
Tanahku, negeriku yang kucinta
Indonesia Raya, merdeka! Merdeka!
Hiduplah Indonesia Raya!

인도네시아, 나의 조국
나의 피로 세운 땅이여,
거기에 내가 서있다네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인도네시아, 나의 나라여,
나의 민족과 조국이여,
다 같이 외치자.
인도네시아인이여 단결하라!

나의 땅이여 영원하라, 나의 나라여 영원하라
나의 국민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이여,
그의 영혼을 일어나게 하라, 육체를 깨워라.
위대한 인도네시아를 위하여.

(후렴)

위대한 인도네시아여, 자유로워라! 자유로워라!
사랑하는, 나의 집과 나의 나라여.
위대한 인도네시아여, 자유로워라! 자유로워라!
위대한 인도네시아를 위하여.

- 인도네시아 국가(國歌) 인도네시아 라야 1절


2억 7,000만 인도네시아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인도네시아 라야는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적 결의를 다지는 역사적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28년 10월 28일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애국 청년들이 자카르타에 모여 '하나의 인도네시아 국민', '하나의 조국', '하나의 언어'로 자주적인 나라를 건설하자고 굳게 다짐합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자와섬, 수마트라섬, 술라웨시섬 할 것 없이 모두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였고, '동인도(Nederlands-Indië)'라고 불렸습니다. 인도네시아라는 용어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맹세(Sumpah Pemuda)'는 수많은 섬과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의 민족적 단합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민족 지도자들의 분연(奮然)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인도네시아가 육지 면적이 190만 5,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전체 해양 면적은 580만㎢나 되는 어마어마한 해양 대국을 이뤄서 독립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네덜란드는 일제(日帝)에 빼앗겼던 인도네시아를 되찾으려 혈안이 되었거든요.




네덜란드 군인들은 일제의 무장 해제를 위해 점령군 행세를 하며 들어온 영국군 부대에 꼽사리를 끼어 인도네시아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예상외로 큰 저항에 부닥쳤습니다. 인도네시아는 한숨에 다시 집어삼키기에 너무나도 큰 덩어리였던 겁니다. 인도네시아 역사를 연구한 릭클레프(Merle Calvin Ricklefs)의 말을 빌자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350년 동안 천천히 점령해 나갔고, 그 과업이 완수되기 전에 인도네시아를 일제에 통째로 내주게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에 패망했다가 이제 막 되살아난 네덜란드의 국력이 예전만 못했기에, 인도네시아를 하루아침에 다시 접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동남아시아사령부 지휘관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Lord Louis Mountbatten) 장군은 네덜란드 정부의 고집에 회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땅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동부(East Indonesia)만큼이라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민중들은 '위대한 인도네시아(Indonesia Raya)'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매년 10월 28일을 '청년 맹세의 날(Hari Sumpah Pemuda)'로 지정하여 국경일로 기념합니다. 국민 단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체성을 되새길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지요. 자카르타에는 '청년 맹세 박물관(Museum Sumpah Pemuda)'이 있으며, 이곳의 벽면에는 인도네시아 라야의 악보가 새겨진 석판이 있습니다. 글귀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다 보면, 청년의 맹세를 다짐했던 민족 지도자들이 꿈꿨던 인도네시아의 이상(理想)이 노랫말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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