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와게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 핏줄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럽인 초등학교(ELS: Europeesche Lagere School)에서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네덜란드 식민 통치 아래 인도네시아에서 ELS에 입학할 자격은 유럽인 혈통의 자녀와 현지인 귀족 자녀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서구화된 인도네시아 명망가 자녀들에게 네덜란드어로 유럽식 교육을 제공하고, 이들을 식민지 행정 업무에 협력할 현지인 관료로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와게는 ELS에 들어갈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와게의 학업 성적이 우수했지만, 날 때부터 정해지는 신분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고 말레이인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부(祖父)로부터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도 갈고닦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교사 양성학교인 보통학교(Normaal School)에 입학할 수 있었고,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뤄냈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국민이 목청 높여 자랑스럽게 부르는 국가(國歌),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의 작사·작곡자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Wage Rudolf Soepratman)입니다.
인종 차별을 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났던 유년 시기의 경험은 와게가 정체성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와게는 1903년 3월 9일 자카르타 교외의 자티느가라(Jatinegara)에서 자와인 집안에서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동인도(Nederlands-Indië)'라고 불렀던 식민지의 치안 유지 업무를 담당했던 네덜란드 왕립 동인도 군대(KNIL: Koninklijk Nederlands Indisch Leger)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른 부대로 전입(轉入)할 때마다 와게의 가족은 늘 이사를 해야 했지요.
와게의 큰 누나 루키옘의 모습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와게보다 13살 더 많은 맡누나인 루키옘(Ny. Roekijem Soepratijah van Eldik)이 집안에서 엄마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루키옘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KNIL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했던 빌럼 마르티뉘스 반 엘딕(Willem Martinus van Eldik)에게 시집을 갔는데, 아버지가 군에서 제대하고 연금 생활자가 되자 남편의 도움으로 열한 살 난 어린 동생 와게를 술라웨시섬의 마카사르(Makassar)로 데려가 ELS에 집어넣습니다. 동생이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길 원했던 겁니다. 루키옘은 와게가 남편의 피붙이인 양 그곳 교장선생님을 속이려고, 동생 이름에 '루돌프'라는 유럽식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와게는 '내가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을 수도 있지요.
정체성은 본디 '나'와 '남(他者)'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가도, 누군가가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면서 남들과는 달라 보이는 나의 한 부분을 발가벗기면, 그때 가서야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정체성이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닌, 다층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정체성이 강조되거나 부각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솟아오르는 정체성이 인종이 될 수도 있고, 국적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성적인 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저도 종교가 달랐다는 이유로 정체성 자각을 군대에서 경험한 적이 있거든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