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의 부재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에 이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탈리아에는 약 2~3백만 명의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합니다.
이탈리아 헌법 제8조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종교 단체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종교 단체들이 국가와 협의하여 법적 지위를 얻고, 그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국가와 종교 단체가 체결하는 협정을 Intesa와 Concordat라고 하는데, 이는 종교 단체가 국가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여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처럼 오랫동안 로마가톨릭 국가였던 역사적 배경이 있지요. 1929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바티칸 사이에 체결된 라테란 조약(Lateran Treaty)으로 이탈리아 정부가 로마가톨릭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고, 바티칸 시국을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등 로마가톨릭은 이탈리아에서 사실상 국교(國敎)로서 우월적 지위를 누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1984년 이탈리아 정부가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강화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로마가톨릭을 더 이상 법적으로 국교로 간주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Concordat을 교황청과 체결합니다. 이에 따라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은 이제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지요. 또한, 종교 교육은 여전히 공립학교에서 제공되지만, 의무가 아닌 선택 과목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그 대신 납세자들이 그들의 소득세 중 0.8%를 로마가톨릭 교회에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Otto per Mille' 세금 제도를 도입하여 교회가 계속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될 여지를 남겨뒀습니다. 반면, 로마가톨릭 외의 종교 단체들은 이탈리아 정부와 Intesa를 체결하여 법적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현재까지 로마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유대교 등을 포함하여 13개 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이탈리아 거주민의 20분의 1이 무슬림이니, 이탈리아에서 이슬람의 교세가 상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현지 무슬림들이 이탈리아 정부와 Intesa를 체결하지 못한 탓에 신앙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느끼게 되고 적지 않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Intesa를 체결한 종교 단체는 앞서 언급한 'Otto per Mille' 세금 제도를 통해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납세자가 세금의 0.8%를 특정 종교 단체에 기부하도록 허용하거든요. 또한, Intesa를 통해 종교 장소의 운영과 보호는 물론이고, 종교 관련 행사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됩니다. 종교 단체가 학교, 병원, 군대 등 여러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신도들에게 신앙 활동을 제공할 권리를 얻으려면 국가와 Intesa를 체결해야 하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군에 복무하는 무슬림 장병을 위한 군종장교를 부대로 파견하려면 이슬람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Intesa가 체결되어야 합니다. 무슬림 단체들은 Intesa의 테두리 밖에 있으니 이 모든 혜택에서 배제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무슬림들이 신앙 활동의 기본인 예배 장소를 마련하는 데도 큰 제약이 따릅니다. 모스크를 신축하지 못해, 소방 안전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위생 상태도 좋지 않은 무허가 기도소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무슬림들이 왜 여태껏 정부와 Intesa를 체결하지 못하였을까요? 무슬림 단체들의 대표성 부족과 이슬람 공포증(Islamophobia)이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저항을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우선 대표성 문제부터 따져보겠습니다. 독일 무슬림의 절대다수가 터키인이고, 프랑스 무슬림의 대부분이 알제리 및 모로코인인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무슬림들의 국적 구성은 모로코, 이집트, 알바니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어느 한 나라에 편중되지 않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무슬림들도 말이 통하는 같은 나라 사람끼리 모여 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 출신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많으면 한 곳에 그 나라 출신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현지 언어를 배우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 통합에 장애가 될 수 있으며, 이민자들이 현지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민자들의 고른 국적 구성은 무슬림들이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현상을 방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들이 신행(信行)에 대한 생각이 다양하고, 국적마저 판이하다 보니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집니다. 이처럼 이탈리아 무슬림 공동체 내부의 다양성 때문에 그들을 대변할 대표 단체를 결성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며, 이는 이탈리아 정부와 Intesa를 체결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9/11 테러 이후 이탈리아 사회에서도 무슬림들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이슬람 공포증이 확산하였습니다. 여기에 지중해를 통한 난민 유입이 겹치면서 반난민 정서가 퍼졌고, 그 결과 모스크 건립에 반대하는 여론이 점차 커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극우 정당이 득세하는 상황이 되어, 무슬림 커뮤니티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저항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극우 정당 출신 의원들은 역사적 건축물 보호를 내세운 도시 계획을 악용해, 모스크 건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독소 조항이 포함된 법안을 발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지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반발은 무슬림들이 정부와 Intesa를 체결하는 데 있어서 추가적인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론을 의식한 이탈리아 정부는 내부에서 교통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슬람 단체들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부족합니다. 이슬람을 비공식적 관계의 틀에서 관리하는 선에서 머무르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이탈리아 무슬림들의 경험은 한국 무슬림 공동체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슬림들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끼리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사람끼리 국적별로 모이는 경향이 있는데, 재단법인 한국무슬림중앙회(KMF: Korea Muslim Federation)가 국내 무슬림들의 대표 단체로 기능하면서 이러한 분화를 넘어 통합된 목소리를 내며 국내 무슬림 공동체의 권익을 대변하고, 우리 사회 내 다른 종교 공동체와의 소통의 주체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KMF와 노선이 다른 신생 무슬림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 한 단체로부터 가입과 활동을 권유받았으나, 작은 공동체 안에서 수많은 단체가 난립하여 발생할 혼란을 우려해 이러한 청을 거절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단체들이 증가하는 것은 긍정적일 수 있지만, 대표성을 띤 단체가 사라져 무슬림 공동체가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정부와 협상하거나 사회에서 권익을 보호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교훈을 이탈리아 무슬림들이 처한 사례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Mezran, K. (2013). Muslims in Italy: The Need for an ‘Intesa’ with the Italian State. The International Spectator, 48(1), 58–71. https://doi.org/10.1080/03932729.2013.758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