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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Sep 22. 2024

몬팔코네에서 크리켓은 왜 혐오스러운 스포츠가 되었나

이탈리아 조선업 도시의 정체성 전쟁

크리켓은 야구를 닮은 운동 경기입니다. 야구처럼 타자(batter)를 향해 딱딱한 공을 던지는 볼러(bowler)가 있고, 타자는 배트를 힘껏 휘둘러 외야수(fielder)가 잡을 수 없게 최대한 멀리 공을 쳐야 득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자가 친 공이 필드를 넘어가면, 6점을 득점하는 '식스런' 홈런이 됩니다.



영국이 종주국인 크리켓은 인도, 파키스탄 등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축구보다도 인기가 높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 메달 하나 따기도 힘든 방글라데시는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크리켓으로만 동메달 2개를 획득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크리켓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그 경기를 제가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현장에서 관전했지요. 크리켓은 방글라데시 국민에게 국가적 자부심을 안겨주는 중요한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어떤 별난 도시에서는 크리켓 시합을 하다가 적발되면 100유로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몬팔코네(Monfalcone)는 이탈리아 북동부 트리에스테(Trieste)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항구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우리나라의 거제도처럼 조선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유럽 최대이자 세계 4위의 조선사인 핀칸티에리(Fincantieri)가 크루즈 선박을 건조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고되고 힘든 조선소 근무를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저출생 및 고령화 문제가 맞물리면서 조선소에서 일할 인력을 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대부터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이 이 공백을 메우며 몬팔코네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이 멈추지 않도록 노동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핀칸티에리의 몬팔코네 조선소 전경


하지만 많은 현지 주민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반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워온 신생 극우 정당 '동맹'(LSP: Lega per Salvini Premier) 출신인 안나 마리아 치신트(Anna Maria Cisint) 시장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즐겨하는 크리켓 시합을 공공장소에서 열지 못하도록 하면서 정체성 전쟁이 더욱 심화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도시는 인구가 3만 명에 불과하지만, 그중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 치신트 시장이 무슬림 문화원에서 회중예배를 금지한 결정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지역사회 내에서 종교적 자유와 다문화 공존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공공장소를 점유(占有)하여 크리켓 시합을 즐기고, 문화원 앞에 몰려들어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기도하는 모습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또한, 도시에 방글라데시 식품을 파는 식료품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지역사회의 공간을 점유하고, 그들의 문화가 확산하는 것에 대해 현지 주민들이 정체성 불안문화적 충돌을 느끼고 있습니다. 크리켓은 그들에게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문화의 공습(攻襲)처럼 인식됩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불법으로 들어온 난민들과는 달리,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인 인력을 받아들인 이탈리아 정부의 부름에 응하여 합법적으로 입국한 사람들입니다. 조선소 같은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장에서 오랜 기간 땀 흘리며 노동력 부족 문제에 시달려 온 이탈리아 경제에 기여왔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취득하여 사회 일원으로 뿌리내렸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교적 자유와 같은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을 보장받을 권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구 모스크 건립을 둘러싼 진통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을 보면, 몬팔코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저출생과 고령화로 고민하는 대한민국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공장 운영이 불가능하고, 추수조차 힘든 농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몬팔코네가 당면한 문제는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과제입니다. 이민자 유입과 그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갈등 해소는 일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사회 통합과 정체성 갈등에 대한 해법을 요구하는 복잡한 숙제이므로, 장기적인 사회 안정과 경제적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면밀한 정책적 준비와 사회적 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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