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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Oct 04. 2024

조심하세요! 이 노래들은 뼛속까지 정치적입니다

가사가 없는 스페인 국가

국가(國歌)에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스페인과의 8강전 킥오프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광화문 광장에 모여서, 오늘 처음 만난 '너와 나'가 손잡고 다 함께 애국가를 불렀잖아요.


그런데 노랫말이 없다면 어떨까요? 참 황당하겠죠? 따라 부를 가사가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곡이 끝날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어야 할 겁니다. 깃발이라도 살랑살랑 흔들면 좀 흥이 날까요? 그게 뻘쭘하면 "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하고 흥얼거리기라도 하든가요.


당시 스페인 선수들은 국가가 연주되는 내내 입하나 뻥긋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행진곡(Marcha Real)이라 불리는 스페인 국가는 1770년에 국가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얼마 후 일어날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 목이 댕강 잘려 나갈 운명이었던 루이 16세의 사촌인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좌에 앉던 시절이었지요.


만약 선수 중 한 명이 뭔가를 부르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라도 했더라면 당장 구설수에 올랐을 겁니다. "우리나라 국가는 가사가 없는데, 넌 거기서 무슨 엉뚱한 가사를 넣어서 노랠 부른 게냐"라고 추궁당하겠지요.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 경기 시작을 앞두고 스페인 국가가 연주될 때 선수들의 모습.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스페인 만세! 일어나라, 스페인 국민의 아들들이여, 다시 부흥하는 우리 조국을 위해 팔을 들어 올리세(¡Viva España! Alzad los brazos, hijos del pueblo español, que vuelve a resurgir)"로 시작되는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939~75) 시절 가사넣어 부른 게 아닌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할 겁니다. 그랬다간 당장 선수단 안에서 내분이 생겨서 선수들끼리 패스를 안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프랑코는 가톨릭교회와 국가 권력을 결합하여 통합된 스페인 정체성 구축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등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억눌렸습니다. 그 결과 스페인 중앙 정부와 지역 민족주의 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카탈루냐처럼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겠다는 지역들이 생겨났습니다.


스페인 대표팀은 막강 전력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대회마다 고배를 마셨고, 스페인 출신과 카탈루냐 출신 선수들끼리 사이가 나빠서 우승을 못 한다는 소문이 돌곤 했지요. 결국 스페인 대표팀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비로소 우승컵에 처음으로 입을 맞추면서 그런 소문도 잠잠해졌으나, 2017년 10월 1일 카탈루냐가 독립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강행한 뒤 불화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프랑코 독재(1939~1975) 시기에 사용된 '가사가 있는' 스페인 국가


스페인어를 조금 알다 보니 가사를 붙인 노래를 듣고 나서는 기운찬 가사가 머릿속을 자꾸만 맴돕니다.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los yunques y las ruedas cantan al compás un nuevo himno de fe(모루와 바퀴들이 박자에 맞춰 노래하네, 새로운 신앙의 찬가를)'라는 구절이 등장하지요. 종교와 국가를 결합하려 했던 프랑코 정권의 이념을 담은 구절입니다. 제가 프랑코 정권의 극우 가톨릭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스페인 국가를 들을 때마다 "비바 에스빠냐! 알삿 로스 브라소스, 이호스 델 뿌에블로 에스빠뇰"하고 저도 모르게 가사를 붙여서 부르게 됩니다. 말(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리고 노래에는 말이 있어야 국기나 국장(國章) 같은 시각적 상징물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힘을 갖게 됩니다. 국가를 제창하는 사람들(the singers-in-unison)은 노랫말 속에 담긴 학습된 역사, 문화, 가치관을 목청 높여 부르짖으며 이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일면식도 없어서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광화문 광장에 모여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느끼는 '상상된 공동체'를 지탱할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가사를 주의 깊게 읽으면, "이 노래를 부르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은 한반도 전체를 비유적으로 부르는 말이지요. 이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함"이라고 규정한 대한민국임시헌법(제3조)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한 대한민국헌법(제3조)에 나타난 국가(國家)의 경계를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되새기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공식 국화(國花)가 아닌 무궁화를 우리가 국화로 여기는 데에는 애국가 가사의 공이 적지 않을 겁니다.


2024년 4월 17일 북한이 평양에 세번째 건설되는 1만세대 신도시인 화성거리 2단계 1만세대 살림집 완공을 기념하는 준공식에서 가사가 수정된 '애국가'를 공개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 은금(銀金)에 자원도 가득한 /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 반만년 오랜 력사에
(후렴)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 길이 받드세

- 북한 《애국가》 1절
*최근 북한은 '애국가'라는 명칭도 버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로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에 한 민족이 아닌 '적대적인 두 나라'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풀이됩니다.


북한은 최근 애국가 가사에서 '삼천리'라는 말을 삭제하고, 이를 '이 세상'으로 교체했다고 합니다. 2024년 1월 15일에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관계에서 유사시 무력 통일의 대상이 되어야 할 주적으로 선언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노랫말에서 말 한마디도 허투루 다뤄지는 법이 없습니다. 국가(國歌)는 국가(國家) 권력의 이데올로기 장치이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저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노래 여행을 하는 동안 이것만은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노래들은 뼛속까지 정치적입니다. (계속됩니다)



참고문헌:


Jimmy Burns. (2017년11월6일). In troubled times, FC Barcelona defines modern Catalonia. Politico. https://www.politico.eu/article/fc-barcelona-catalonia-independence-upheaval/

Jone Stone. (2017년10월27일). Catalonia’s independence: How did it happen? A timeline of key events. Independnet.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europe/catalonia-independence-what-happened-spain-timeline-events-referendum-latest-a8023711.html

Julian Rieck. (2017년4월4일). A Symbol of Spain’s Internal Battles. Forum for International Cultural Relations. https://culturalrelations.ifa.de/en/focus/article/a-symbol-of-spains-internal-battles/

이승현. (2024년4월17일). 북, 화성지구 2단계 1만세대 준공식..3번째 1만세대 신도시. 통일뉴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482

서원극. (2021년8월3일). 나라꽃 ‘무궁화’, 공식 국화가 아니라고?. 소년한국일보. https://www.kidshankook.kr/news/articleView.html?idxno=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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