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그 창업 이야기#01] 사업으로 꿈꾸는 나은 세상
가사노동 스타트업 프리그
by 산업인류학연구소 박준영 Oct 31. 2021
스티브(CEO)와 준(COO, 필자)은 2008년 삼성전자에서 만났습니다. 스티브는 수학을 잘하는 문과생이었는데 정보통신, 전자공학 쪽에 관심이 많아 조립 컴퓨터를 직접 만들 수도 있었죠. 90년대 처음으로 PC에 사운드 카드가 도입됐을 때 세운상가에 가서 전자 부품을 사고 직접 사운드 카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준은 수학을 못하는 이과생이었습니다. 다만 화학을 좋아해서 화학공학과에 진학을 했었지만, 여전히 수학은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준은 2005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의 공정개발 연구원으로 입사했다가 엉덩이 힘이 중요한 연구직보다 사람과의 만남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반도체 인사팀 경영지원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거기서 스티브와 준은 만났고, 이후에 평생 소주 한 잔 마실 수 있는 형 동생 사이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그 관계에 수학 공식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스티브는 예전부터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고, 전자제품 영업 마케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삼성전자에서 영업 마케팅 업무도 하다가 또 다른 사업 영역을 탐구하다가 건설업, IT업의 인사팀장을 하고 스타트업에서 인사 자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삼성에 있을 때부터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삼성에서 몇몇 동료들과 실제 사업 아이템을 꾸리거나 창업 캠프에 참가하면서 그 꿈을 단순한 희망으로만 여기지 않고 실천해 갔습니다. 그는 2019년 직장인을 정리하고, 사업가로서 삶을 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준은 10년 차 삼성전자 인사담당자를 하다가 글 읽기와 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글 쓰는 작가가 되거나 말하는 강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아울러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회사 다니면서 경제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준은 '지표와 통계'로 사회와 삶을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 삶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 위해 35살에 회사를 휴직하고 세계일주를 다녀왔습니다. 준은 그 여행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던지, 굶어 죽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과 '살면서 필요한 것이 작은 배낭에 담긴 5kg에 불과하구나, 나머지는 욕심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월에 200만 원만 있으면 살겠다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문화 인류학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엉덩이'의 가벼움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논문에 괴로움이 클 때, 실력의 부족함을 느끼며 상당히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브와 준은 적어도 분기에 한 번은 만나며 서로의 길을 응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20년 12월, 준이 박사논문 심사에서 탈락을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스티브의 상현역 공유 오피스를 방문했습니다. 스티브는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을 엑셀로 50여 개 정도 정리했으며, 그것 중에서 지인들이 매력 있다고 선정한 10여 개 아이템을 준에게 보여줬습니다. 준도 몇 가지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사노동'에 관련된 아이템들이 상당히 구체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술의 다양성과 문명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스티브와 준은 '가사노동'의 변화를 이끈 세탁기, 청소기 등의 역사적인 제품들이 떠올랐고 동시에 여전히 '가사노동'에 관련되어 인간의 '근육'을 벗어났음에도 성역할로 고착화되어 있는 것이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스티브는 아내를 상당히 사랑했고,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아와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었고, 지금은 12살인 첫째를 보다가 무리해서 몸이 아픈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사노동'이 중요한 일이며, 또한 가사노동의 외주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업으로 조금이라도 가사노동이나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준은 박사과정을 통해서 인문학, 여성주의, 여성주의 문화인류학을 배우며 그간의 가부장제가 가졌던 모순점과 모든 이에게 억압과 혹은 부담을 안겨주는 제도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안일'을 여성의 몫으로 당연시하거나 어머니의 역할로만 생각했던 것이 역사적 상황인 것이지 만고의 진리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만큼 가사노동 혹은 재생산 노동 - 소위 바깥에서 물건을 만드는 일을 생산노동으로 부르고, 재생산 노동은 생산노동을 위해서 가족과 사회를 위해 양육, 돌봄을 하는 노동을 말합니다. - 의 가치를 인정해야 조금 더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의 한 발자국 나아감에 있어서 내가 연구자로서 크게 기여한다면 좋겠지만 그 역량과 적성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학문적 역량은 흡수하면서도 글보다 삶에서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업은 그전에 생각지도 않았었죠.
준: 지금 이야기하는 아이템의 철학적 기반은 '소셜 마더링'이네요.
스티브: 응? 소셜 마더링?
준: 네, 그렇죠 엄마 역할을 사업에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인데, 그게 엄마의 역할을 사회가 함께하고, 사회가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스티브: 응 그렇지 그렇지.
준: 오. 그러면 저도 상당히 관심 있는 일이네요.
2020년 12월 말, 준 에게는 논문 심사에 한 번 떨어진 불안감과 결혼 12년 만에 태어나는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겹쳐있었습니다. 스티브에게는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 소셜 마더링이라는 단어를 만난 반가움이 생겼습니다. 2021년 새해, 다시금 둘은 회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수학공식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나의 꿈을 팔려면 정말 세밀해야 하고, 관심을 실행으로 옮기려면 5차 방정식 같은 고난도의 공식을 같이 풀 것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 "프리그 창업 스토리 #02: 너랑 하면 다 될 것 같다"는 다음 주 수요일(11월 3일)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