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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이즈어프레이드

 [글레디에이터]의 악역 호아킨 피닉스는 [그녀], [마스터], [조커]까지 아무도 소화할 수 없는 극중 인물을 연기하며, 작품 자체에 녹아들어 버린다.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무턱대고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썸네일의 호아킨 피닉스는 보(Beau)가 되어버린다. 촬영 그 어떤 순간도 보이즈(Beau is)는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어 보인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와 발음이 상당히 비슷하지만, 용기보다 두려움을, 바깥보다 내면을, 성취보다 실패를, 연결보다 단절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보이즈어프레이드(Beau is afraid)는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하는 긴 영화이다. 전혀 지루할 틈이 없는데, 시간이 조각보처럼 붙여졌다가 떨어지고, 꿈처럼 다가왔다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장면부터 1인칭 주인공의 시선으로 깜빡깜빡 거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시선은 자주 1인칭 시점으로 옮겨가고는 하는데, 이는 어리둥절함과 함께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태아가 출생했을 때 그의 시선으로, 아이가 엄마의 허리춤을 보는 시선으로, 성인인 보가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잠이 들었는데 인부의 가슴이 보이는 시선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시선은 보의 일생을 현재의 걱정 많은 보가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현재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래도록 기억될 어떤 영화처럼 보의 현재는 엄마 모나의 훈육 속에서 구성되고 있다. 물론 사랑과 훈육의 경계는 계속 흩어진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언제나 '너'로부터 구성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보는 당면한 몸의 고통과 두려움으로 구성되던 우연이던 왜곡되어 있던 현재에 있으며,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점은, 일주일의 시간이다. 보는 아주 허름한 골목에 살고 있는데,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과 약을 먹거나 강박에 빠져있거나를 선택해야 할 정도로 기괴하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성기를 드러내며 욕과 살인을 일삼는 인물, 부랑자인 것 같으면서도 무단으로 보의 집을 침입하는 사람, 물 하나를 먹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달려갔다가 거스름돈을 잘 내지 못하는데 경찰을 부르겠다는 사람, 전쟁에 떠나간 아이 얼굴을 퍼즐로 만들어 매일 조립하는 엄마, 보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공명심을 내세우며 인간의 근본적인 기반인 관혼상제 의례를 무시하는 의사, 보에게 일부러 마약을 먹게 하고 자신도 페인트를 마시며 죽어버리는 아이. 


 나열하기도 어려운 보를 두렵게 하는 사례들은 보가 엄마를 보러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사건이 발생하고, 다시금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벌어진다. 중간중간 보는 사고로 공간적 이동을 망각 속에서 진행하는데, 이는 보의 현재 감각 속에서 두려움의 조각으로 계속 축적이 된다. 갑자기 만난 어떤 연극 공연자리에서 회화적 풍경이 이어지고, 영화에서 수 많이 등장하는 가족 자체가 가진 남성성의 폭력,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근 욕망, 핏줄은 현재 욕망, 자본, 사랑과 양육이라는 방식 속에서 다양한 인물과 가면을 통해 등장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표적으로 엄마, 그리고 중산층처럼 자애로운 척하는 여성, 그와 함께 사는 강박의 여성, 순결과 달리 잠자리할 때 원하는 음악이 트는 첫사랑은 상당히 능수능란하며 주도적이다. 성적 역할의 한계와 그 모호성을 드러내준다. 



 호아킨 피닉스의 상대역인 엄마 모나(페티 루폰)은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가 겪었던 것과 전혀 다른 거울면으로 드러내며 보(Beau)에게 작용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의 오류는 내가 경험한 세계를 제외하고 과연 세계는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 그 감각의 구성이 '나'라는 명확하지 않은 주체를 구성하게 되며, '너'라는 나의 모호한 바깥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수 많이 붕괴되고 있는 가족은 가장 가깝고 두려운 관계이고, 사랑 또한 다르지 않으며, 강박으로 내몰렸을 때 평온은 또 다른 강박임도 알게 된다. 지금의 현실과 나와 맺는 관계, 혹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시적 '나'가 강박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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