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영화
영화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3년 4월 1일, 아일랜드 본토가 보이는 섬 이니셰린이다. 두 사내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펍과 집, 그리고 길가에서 그들은 마주친다. 당장 3월 말일까지 매일 펍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마을이 다 아는 절친 파우릭과 콜른은 4월 1일부터 서먹해졌다. 콜른이 더 이상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싶지 않고, 그는 음악활동에 전념하면서 죽어서도 이름이 남는 곡을 쓰겠다며 파우릭과 절교를 선언했다. 마음씨 좋은 파우릭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왜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콜른은 무섭게도 더 이상 말을 걸어오면 음악활동 - 바이올린 연주 - 에 방해가 될 텐데도,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우유를 팔아 돈을 받은 날 타우릭은 위스키 석 잔을 마시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콜른에게 따진다. 이 영화 메시지의 하나일 텐데, 이름을 남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포기하고, 관련된 관계를 삭제하는 콜른과 가족과 친구끼리 다정하게 지내고 그 이름을 가족끼리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파우릭은 삶의 방향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어떤 삶도 경중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름을 남기는 삶과 삶을 함께하는 사람 속에서 이름, 그렇게 큰 차이가 난다.
결국에 그 둘은 막바지까지 큰 다툼을 이어가고, 콜른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기도 한다. 관객들은 사뭇 낯선 광경들을 여기서부터 보게 되는데, 어떤 인간이 절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느냐며 으름장 용으로 여겼던 손가락 절단을 직접 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우릭은 콜른이 손가락을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끝까지 친구끼리 왜 그러냐며, 우울해 보인다는 식으로 대충 관계를 복원하려 한다. 물론 마지막에 그도 결국 몇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영화가 상당히 뛰어난 점은 이런 낯섦이 단순히 현대 사회에서 보기 힘든 공동체 관계 제시에 그치지 않는다. 파우릭의 동생이자 책을 많이 읽었던 여동생 시오반은 그 시절 여성들이 겪었던 가계의 재생산 노동을 뿌리치고 결국에 본토의 도서관에 취직하게 된다. 말썽꾸러기 도미닉은 시오반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거나 파우릭이 잘못된 말을 했을 때 정정하라며 나무라는 모습을 보인다. 근대적 형벌체계가 명확히 뿌리내리지 않았던 시기, 도미닉의 아버지 경찰관은 아들을 자주 폭행하고 주먹을 휘두르지만, 자위하며 술에 취한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가톨릭 예배를 하고 고해성사 장소에 가서 신부에게 말을 하지만, 신부 또한 공동체 현황을 도리어 물으며 신성화되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언가 미래를 예측하는 노파는 그의 예상은 결국에 틀린다.
매일 해가지고 다시 뜨는 외딴섬에서 완벽히 공동체에 엮인 그들은 그 어떤 사건에는 현재 우리의 삶과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회복되거나 개선되는 형태로서 전개하지 않는다. 1차 대전에 참전해서 국력이 약화된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 뒤에 결국에 다시 아일랜드 인들은 둘로 갈라져서 내전을 하고, 섬에서 본토의 포격소리를 듣는다. 그 경계선은 언제부터 갈라졌는 줄 알 수 없으나, 지금 아일랜드를 북아일랜드로 나누고 오랜 기간 벨파스트와 더블린으로 나누어 전쟁을 해왔던 것, 한 번 뱉어낸 말로 경주마처럼 그 말을 책임지려는 무책임함이 그 경계선을 강화하고 벽을 쌓고 있다. 아마도 그 경계와 다툼을 원했던 사람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