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 나브로

한강-작별하지 않는다 서평

노벨문학상, 한강의 책, 문학을 삶으로 읽기

각별하지 않아도 작별하지 않는다.


제목만 보고, 책을 읽기 전부터 각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각별하다는 단어는 책에서 한 두번 정도 나왔는데, 나는 왜 각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저자 한강의 말처럼 문학이 죽은자가 산자를 살리는 것이고, 생명과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저자는 그 많은 죽음들을 천천히 써 내려갔을까? 경하의 꿈에 나왔던 굽은 나무들과 인선이 꺼져가면서도 모았던 백여개가 넘는 잘린 통나무들 속에서, 꿈과 자연에서 매일 일어나는 각별하지 않는 것 속에서 삶을 애써 키워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하야.

인선이 전송한 내 이름이 문자 창에 단출하게 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인선을 처음 만났다. 내가 입사한 잡지사에는 사진기자가 따로 없어 편집기자들이 대부분의 사진을 직접 찍었지만, 중요한 인터뷰나 여행 기사를 진행할 때는 각자가 구한 프리랜서 사진가와 짝을 이뤄 다녔다. 길게는 3박 4일을 함께 여행해야 하니 동성이 편할 거라는 선배들의 충고대로 사진 프로덕션들을 수소문해 동갑내기 인선을 소개 받았다. 그후삼 년 동안 매달 함께 출장을 다녔고, 퇴사한 뒤로도 이십 년을 친구로 지냈으니, 그녀의 습관들에 대해 알 만큼 안다. 이렇게 내 이름만 먼저부르는 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한 용건이다.

응. 무슨일이야?

털장갑을 벗고 답 문자를 보낸 뒤 잠시 기다렸다. 바로 답이 오지 않아 장갑을 다시 끼는데 문자가 왔다.

지금 와줄 수있어?


수 많은 얼굴들 속에서 경하와 인선이 있다. 둘은 일로 만난 사이지만, 글과 사진처럼 함께할 수도 있고 따로 설 수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둘은 연결되어있지만 느슨한 관계였다. 굳이 정상가족이 아니어도 한 두마디 글자로도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촘촘해질 수도 있었다. 일을 벗어나 삶의 영역에 겹친 둘, 급한일로 부탁을 했다. 경하와 인선은 각별하지 않았지만 결국에 죽음을 꿈꾸는 경하가 죽어가는 인선과 작별하지 않았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서랍 속에 천만 원을 담아두었던 그녀와 저녁을 먹었었다. 음악 선생님이었던 그는 이른 퇴직 이후에 세계를 떠돌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도 죽음만은 비켜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마저 짐이되지 않고자, 조카에게 마지막 부탁을 미리 해 놓았다고 했다. 장례비와 그간 삶의 흔적을 정리할 비용까지 천만 원정도 드는 것 같아서 마련했다고, 힘 쓰지 말고, 부탁해서 정리해달라고 말이다. 지금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나, 드문드문 떠오른다.


죽을 이유를 찾으려던 경하는 인선의 사고를 알게 된다. 그 연루는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경하가 꿈꿨던 어둠 속에 나무들, 그것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다. 4년 전에 서로 말했지만, 거리를 두었던 관계에서도 인선은 꼭 그 과제를 하자고 했다. 매년 그 꿈을 이뤄가기보다 뒷걸음쳤던 경하와 달리, 인선은 백여그루 나무를 잘랐다. 그것에 맞게 잘라서, 다른 일에는 쓸 수 없다고 했다. 차일 피일 미루다가 그 절단이던, 어떠한 일이던 잘라내다가 그라인더에 손가락을 잘리는 부상을 당한 것이다.

3분마다 한번씩 잘린 부분에 피를 내어야 손가락이 붙을 수 있다는, 그리고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진단과 처방은 키보드를 치는 이 순간에도 내 손가락에 전해오는데, 경하는 그것을 묵묵히 참았다. ‘그만두고 싶어’라고도 하면서도, 인선의 일생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는 일, 곧 손가락이 기능해도 고통은 남아있는 것을 선택했다.


미력하나마 삶을 놓으려는 경하와 미력하게 남은 삶을 지키려는 인선은 그 안에서 만난다. 병실의 자기보다, 살아있을 수 있는 가벼운 앵무새 아마를 살려달라는 것이 오랫만에 ‘경하야’라고 보낸 인선의 급한 마음이었다. 3분마다 아픔을 견디는 고통, 그라인더에 잘린 손가락으로 평생갈 아픔을 내재한 삶, 그것은 이 책의 주요한 배경인 ‘제주 4.3사건’의 침통한 고통을 담고 살아간 경하 엄마의 삶과 연결된다.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두고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나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213


소개령 바깥의 친척이 있어 목숨을 슬프게도 살게 된 엄마와 큰엄마는 날카로운 학살의 기억들 실톱에 서서 살아갔다. 가족은 4.3 때 땅에서 죽음으로 살았고, 엄마는 생존해서 죽음을 직면해 살았다. 유해가 되어 나중에 발굴되는 가족들은 오랜 기간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면서 살아갔다. 작별하지 않게되는 이유는 기억하는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결국에 기억에 달려있고, 기억만이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34


그라인더와 실톱은, 그리고 경하가 담아두었던 유서는 삶의 벼랑 끝이자 마지막 문턱이었다. 예술의 도구로 삶은 절단이 되고, 거주를 위한 목공 도구가 마지막 생을 재촉하거나 지켜가는 일이 되는일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의미로써 권력을 가진 포고령과 소개령의 글자가 마지막 기억의 욕망마져 삶으로 연결되는 글씨가 된다. 결국 온갖 날카로운 산물과 언어는 작별하지 못하는 의미와 도구의 경계가 되고, 마지막 경하는 마지막 인선의 부탁을 들으러 인선의 목공방으로 향한다.


이 할머니와 비슷한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방언 대신 또렷한 서울말로 인선의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은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99


눈 속에 망중한 같은 할머니를 만나며 제주, 그들의 삶에 오랜 시간 침투되어 있음과 연결된다.폭설은 자연스럽지만 인간에게는 마지막 비행기, 겨우 돌아오는 버스, 그리고 그곳을 무한히 기다리며 그렇게 친절하지도, 냉정하지도 않게 눈이 깊은 마지막 노인을 생성해 준다. 경하가 다시금 꾸었던 그 나무들의 현실에서 경하는 미끄러져서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고, 얼굴에 심한 상처가 났다. 유서 무게도 채울 수 없는 생의 의미는 인선의 부탁으로 채워져, 죽을 힘을 다해 경하는 인선의 목공방에 도착한다.


인선의 목공방이다.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공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들어와보니 내가 기절해 있었대. 피 흘리는 환자를 급히 트럭 짐칸에 실으며 아무도 불을 끄지 않은 거다. 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142


앵무새 ‘아마’를 찾는다. 혹은 아마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마’도 기다렸을 인선의 익숙한 어깨를 휑하니 열린 문도 기다린 것일까. 애처롭게도 불어오는 눈보라라도 문을 달래주고 있다. 인간이 만든 것에 인간이 부여하지 않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는 예술의 가장 앞선 종교의 영역이 된다. 애니미즘, 그 영역 속에서 소설은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하려는 것을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는 꿈처럼 이어지고, 촛불 하나가 꼬박 탈 때까지 심지는 마지막까지 우정이라는 연결을 만들 뿐 헤어짐의 순간을 기다려 준다. 그런 연결성에서 대화는 이어지고,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경하는 인선과 만난다. 인선의 발자국을 따라서, 경하는 덤덤히 인선의 부탁을, 그리고 마지막일 수 있는 마주침을 소설 중후반까지 이어간다.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오른쪽 어깨 위, 스웨터 올 사이로 가칠가칠했던 아마의 두 발이 떠오른다. 내 왼손 집게 손가락을 횃대 삼아 앉아 있던 아미의 가슴털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갖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내가 닿아보았던 어떤 생명체도 그들만큼 가볍지 않았다. 109


인선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가벼워 보이는 아마의 숨을 중하게 여겼다. 삶에서 무엇이 중할까? 생명과 사랑을 넘어서 무거움을 욕망하는 것들은 비극의 단초가 된다. 속세를 떠난 승려처럼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는 무거움과 가짐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무거움을 바라보는 회색 인간은 언제나 있었다. 저자 이삼성은 20세기는 제노사이드의 시대라고 말했다. 발달, 진보는 무엇인가? 킬링필드, 르완다, 코소보, 그리고 세계대전과 6.25 등, 그리고 수 많은 학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부마항쟁, 그리고 행해지지 않았던 촛불 항쟁의 계엄령, 오늘날의 빛의 혁명으로 가장 어둡게 공동체를 밀고 나갔을 123 내란까지도, 그 권력은 엄습할 수 있다. 실톱이 녹슬 때까지, 여순 항쟁을 여순 반란으로, 518을 폭도로, 동학혁명을 농민봉기로,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건국절로 암약한다. 그 녹슴을 벼리고 머리맡에서 기억을 이어나간 인선의 엄마, 인선, 그리고 경하가 그 칼날 위에서 가볍게 버티고 있다. 그럼에도 권력은 계속된 한국 사회의 혁명과 반동의 해방 공간에서 벌어졌던 국가없음과 이념 갈등에서 발발했고, 이승만과 같은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빨갱이’를 만들어 낸다.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괄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281


안타깝게도 2025년에 나타난 쿠데타 세력과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고 있다. 권력자의 편에서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 혹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권력의 문화, 자유로운 사상적 언덕보다 억압 속에 먹고사니즘으로 변모하게 된다. 영화 1987에서 ‘아직 국민들 수준이 직선제가 안된다고‘ TV를 보던 시민이 하던 이야기, 이념이라는 탈을 위해서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마저 침탈하는 폭도들의 행동과 달리 응원봉을 드는 여린 손길로, 눈을 작은 은박으로 버텨내는 이들, 스스로 이것이 맞는 것이냐를 물어봤던 123내전의 특전사들이 조각보처럼 엉켜있다. 그 언저리에 4.3 민중항쟁에서 적이 되어버린 서북청년단, 그리고 그 앞에 스러져갔던 인선과 인선의 엄마, 그리고 사람들의 몸이 있다. 권력의 언어를 체화하고 무채색의 언어를 욕망한 이들과 이것에서 벗어나 삶을 부던히 살폈던 이들이 있다.


우리 서방은 항상 그래서. 이녁은 통역 일만 한다고. 서청이 제주 말을 못 알아듣곡 제주 사름들은 서청 말을 못 알아들으난. 소까이 – 소개 – 때 중산간에 불 놓으렁 댕길 때도 우리 서방은 문 두드령 나옵서. 인제 불나난 혼저 나옵서. 고라주멍 다닌 게 다라고 그래서. 경 헌디 이상해진 건 그때부텅 입대할 때까지 우리 아기를 안지 않는 거라. 이녁헌티 당흐민 부정 탄텐, 눈도 안무치민 안된덴 하곡 정말 눈길도 안 줘서. 229


이제 책은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말갛게 추출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드러나는 촛불의 굵기, 잘려간 손가락의 반도 남지 않을 때, 실톱으로 먼저 생을 견뎌내다 간 엄마의 마지막을 지킨 이야기로 절정을 맞는다. 여기서 우리는 엄마와 딸이라는 혈연적 관계를 지우고, 확장된다. 때로는 스며든다. 구해달라고, 구해달라는 것은 내가 아닌 너였다고, 낯선 사람마저 구해달라고. 사회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지만, 당신이 없다면 사회는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 속에서, 그 으스러지는 포옹이 계속될수록 점점 엄마와 나의 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얇은 피부, 그 아래 한줌 근육, 미지근한 체온과 혼란이 나의 것들과 뒤섞여서 한덩어리가 되었어. 엄마는 나를 죽어가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 언니라고 믿을 때가 더 많았고, 어떨 때는 낯선 사람으로 여겼어. 자신을 구하러 온 모르는 어른. 무서운 악력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엄마는 말했어. 구해줍서. 312


사회는 연결되지 않은 이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여길 때 등장할 수 있다. 한 사람도 한 공동체도 거대한 고통은 굳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픔이 문학의 정수라면, 그 정수의 이유는 속절없이 연결된 공감하는 장면에 있다.

윗옷을 벗은 이모가 양쪽 소매를 이빨로 찢어서 두 군데 상처를 지혈했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 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대.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대.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 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251


한국 사회 아픔의 시원, 제주 4.3 민중항쟁, 사람의 일 앞에서 ’이제는 지루하다‘는 말은 그만큼 게으르다. 소설가 한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이 이야기는 유려한 한 천재의 분투가 아닌 유해 속에서 만들어진다. 작은 돌에게서 사회적 연결을 느끼고, 돌처럼 굳어가는 사회의 온기 속에서 피어나게 된다. 역사가 다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시선이 각별하게 남아있다면, 생은, 그리고 글은 작별하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유쾌함도 덤덤함도, 항쟁의 아픈 기억을 몸으로 지켜내면서 거리를 유지했던 그 누군가를 떠올린다. 돌처럼 굳은 생각이 될지, 단단한 생각을 부술 수 있는 삶이 될지. 돌이 호흡할 수도 숨은 죽음과 같을 수도 있다. 각별하지 않는 이들의 고통에 작별할 마음이 없다면 말이다.


두 발이 돌이 되어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라도 다시 몸을 돌리고 산을 오르면 되었다. 아직 발이 굳었을 뿐이니까. 돌이 된 발을 끌고 몇 걸음 더 오르던 여자가 그러나 다시 돌아본다, 이번엔 종아리까지 돌이 된다. 무거운 두 다리를 끌며 여자가 더 다시 돌아본다. 이번엔 종아리까지 돌이 된다. 무거운 두 다리를 끌며 여자가 더 비탈을 오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거기서 돌아보지만 않으면. 하지만 기어이 얼굴을 돌린다. 무릎 위까지 돌이 되자 더는 방법이 없다. 모든 집과 나무들 위로 차오른 물이 빠질 때까지 거기 서 있다. 골반과 심장과 어깨가 돌이 될 때까지. 벌어진 눈도 바위의 일부가 되어 디이상 핏발이 서지 않을 때까지. 날과 달이 수천 번, 수만 번 지나가는 동안 눈비를 맞고 있다.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이 거기 있기에 계속 돌아보았나?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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