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기록①_인간세보다 바이러스의 시대

다른 SNS 채널에 코로나 관련 글을 올렸던 때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말하자면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야외활동 자제 등의 개인적 준칙이 사회적 규약처럼 권고된 시간이 한 달이 흐른 것이다. 한 달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마스크를 속옷과 같이 여기게 된 작은 변화에서 선진국으로 불렸던 국가들의 대처 및 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행태에 대한 근본적이 재사 유가 진행되는 시점으로, 그것을 매일 운동하듯 결과로 남겨놓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난 한 달 전에 코로나 사태를 지성과 이성 중심의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표지 그림은 르네상스 및 근대성의 상징인 모나리자마저 마스크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초기에는 그동안 썼던 내용을 정리해서 발행하고 4월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씩 올리고자 한다.

2020. 2. 24


국가에서 감염병 단계를 '심각'으로 격상했다. 기억에서 사라진 혹은 타미플루로만 기억나는 2009년 신종플루 이후 11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회사를 다닐 때인데 보통 사람들이 '신종' '신종'이라고 부르며 마스크도 없이 돌아다녔고, '신종' 걸려 좀 쉬라는 소리까지 했었다. 신종플루에 걸리면 4일 정도 병가가 집행되고 사람들은 입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잘 몰랐는데 신종플루 국내 감염자 수가 70만 명이 넘고 사망자가 250명을 넘었다니, 엄청난 일이었다. 그때의 미디어 환경이 전혀 달랐다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나에게 왜 그때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인지. 아마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내 옆에 누군가가 죽지 않았으면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하다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가장 조치가 잘되었다는 참여정부 시기 마스크가 과연 있었나 싶다. 아마도 그때는 외국의 출입 때부터 어떠한 이유에서건 쉬쉬하지 않고 명확한 정보공개와 신속한 대응이 효과적이었고 지금의 코로나 19(COVID-19)와 달리 특정 지역과 종교의 집단 감염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기사에서 보면 초기 대응은 참여정부와 유사하게 했지만 그 이후에는 집단감염이 발발했고 사람들은 '독감'으로 여기고 처방받아 치료한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가 실패라고 기억되는 큰 이유는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한 기업 병원의 이익에 저촉될까 위치를 말하지 않거나 감염자의 경로를 밝히지 않는 등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높은 사망률이 기억이 남으며 초동 대처의 쉬쉬함은 물론, 재난 대응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자임하지 않아 불안에 하던 것이 기억난다. 여전히 그때도 나는 마스크를 하지 않았었다.


이번 코로나 19는 무증상 감염의 바이러스 특성도 있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우한'이라는 지역에서 집단 발발하여 뒤늦게 그곳을 봉쇄해버린 상태에서 '우한'패렴으로 초반에 불렸다. 국내의 초기 감염자가 우한을 다녀온 누군가였는데, 중국인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때부터 나왔었다.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우한 지역의 교민 귀국 비행기와 수용시설 2주 격리라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때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나도 며칠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가 확진자 수가 30명이 되지 않고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던 2월 17일 18일 경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대중교통을 활용하기도 했었다. 이후 특정 지역과 집단의 감염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었다.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KF94 80 마스크 숫자에 익숙하게 되었다. 지역감염이 신종플루 때처럼 확산되어 사람들이 수용해버리느냐 아니면 대량 감염까지 멈출 수 있느냐가 주요한 고비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겨울철에 대유행하는 호흡기 질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체계는 대응할 수 있음뿐 선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는 보통 인간과 같이 잘 짜인 DNA가 아닌 RNA를 기본 단위체로 만들어진다. 잘 짜여진이 결코 '고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생존'으로 보자면 바이러스만큼 뛰어난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RNA는 변이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으며 인간은 현재까지 기술로 변이를 막을 수 없다. 수백 개의 바이러스가 결합한 '감기'는 증상의 치료이지 감기 바이러스를 죽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기만큼 쉽게 변신하는 바이러스도 없다. 인류사의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라는 HIV - 곧 숙주에 AIDS라는 후천성 면역결핍증을 만드는 것 - 는 사망률이 매우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 19에도 AIDS 치료제를 투약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 것으로 생각된다. 위와 같은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있지만 치료는 할 수 있어도 바이러스를 근절하거나 괴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타미플루에 내성이 생긴 바이러스가 언제 올지도 인간은 예상할 수 없다.


아주 오랜 역사에 걸쳐 인간은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여왔고 신석기 이후 정주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축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에 죽어갔을 것이다. 인간 종도 미세한 진화를 거쳐서 혹은 위생과 보건 지식체계의 발달로 익숙한 타 종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총 균 쇠]에서 말하듯이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것은 흑사병을 견딘 유럽인 균의 위력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익숙한 먹거리를 제외하고 음성적으로 혹은 값비싸게 거래되는 동식물의 경우 그 접촉에 의한 새로운 바이러스의 생성은 그렇기 때문에 우연이며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근대성과 전근대성은 발전단계라기보다는 다른 단계로의 전이나 변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처럼 역병의 원인을 군주의 덕성에 비추거나 마녀, 동성애 같은 혐오로 전이시켜서는 안 되지만 여전히 위기의 순간에는 반복되고 있다.


이번 집중 감염의 징후가 된 종교 세력도 다르지 않다. 종교는 근대성에 배치된다. 신성에서 이성으로 변화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리라 근대 합리주의자들은 기대했지만 여전히 미래를 예측하는 '점'은 사라지지 않고 죽음에 대한 근원적 불안에 따라 종교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현시대를 종교가 아닌 과학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종교가 인간에게 사라질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심리적 안정, 미래의 불예 측, 설명 불가한 사건들은 인간의 지식체계로는 알 수 없다.


근대적 국가체계도 동일하다. 국가에서는 어떠한 수단을 활용해서 구성원의 안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러나 안전은 다양한 가치와 맞물리게 되어있으며 선제적 대응으로서 봉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봉쇄를 따르지 않은 어떤 행위의 발생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국적으로 전체화하여 한 집단을 봉쇄하거나 우한처럼 집중된 지역을 무정부 상태로 가두어 놓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관점에서 국가는 구성원의 숫자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 명보다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낫다고 객관적인 숫자로 말은 할 수 있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발생 단계마다 적절하게 대응하는 방법을 복잡한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는 의사결정기구인 국가에서 강제력을 포함해 정치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몸을 가진 인간이면서도 행위를 모두 통제할 수 없는 근대성의 빈자리에는 다만 그 결과로써의 책임도 있지만 투명성이라는 과정의 책임도 국가나 공동체에 있다. 그것이 명확해진 현재의 시기 마스크는 동이 나고 오프라인의 몸끼리 접촉을 최소화하는 상황은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위생과 보건의 기술적 요인에 의한 신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정부의 무책임, 중국인이나 특정 지역 혐오로 돌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전문가 집단이 예상하는 '내 이럴 줄 알았어' 식의 반응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감염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현재와 같은 코로나 19의 특징이나 수칙을 지키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의 발생이라는 상황은 중국인 입국 봉쇄를 안 한 정부의 책임으로 보는 것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이라고 본다. 그나마 인간이 바이러스를 포함한 자연과 다르다고 굳이 주장할 수 있다면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서만 산다고 하지만 - 우리는 자연의 이 아기를 들은 적이 없지만 - 인간은 다른 것을 위해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의 이야기처럼 국가에서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는구나'의 시기적 대응과 투명한 적절성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 개인과 소집단으로서는 혐오와 종교적 맹종에서 벗어나 근대적 인간이 만들어낸 기본적인 가치 판단 기준을 생각해서 무계획이 계획이나 하던 대로 하겠다기보다 더 조심스러운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