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 19_Cultural report
이번 사태에 있어서 '신념'의 역할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누군가는 부르짖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비율은 전 세계 인구의 10% 남짓이며 일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만 그것이 인간을 대체하리라 믿는 '강한 인공지능'으로 전환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인공지능 중 기계학습의 개념을 주장했던 앨런 튜링의 시대에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현재도 말하고 있지만 앨런 튜링의 시대나 지금이나 그때로부터 20년 뒤에는 '특이점(singularity) - 기계가 모든 영역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순간 - '이 올 것이라 예상한다. 20년의 간격은 변한 적이 없다. 코로나의 시대 다시 생각할 것은 인류와 기계의 특이점 전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1명의 감염과 죽음 앞에 그 모든 것이 우주보다 더 큰 특이점(singularity) 임을 인식하는 일일 수도 있다.
2020. 3. 1
새벽 배송 가방을 받으려고 문을 연 것, 아침에 잠깐 나간 것을 빼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바깥공기는 잠시 고등어구이를 하려고 싱크대 앞이나 세탁실 앞 창문을 열어놓은 것 말고는 없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며 낮잠을 자다 결국 이번 코로나 사태와 유사하다는 영화 [컨테이젼 Contagion]까지 보고 잠을 청하기 위해 글쓰기 창을 연다. 2월 29일 토요일 오후 4시 기준 확진자 수는 3천 명을 넘었다. 이제는 검사 현황까지 자료에 나오는데, 오늘 하루만 만 2천 명 넘게 검사를 했다고 한다. Drive Through를 포함해서 엄청난 검사 시약 생산 및 비용의 국가 부담 등으로 대 유행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는 말하자면 안티 판데믹(Anti Pandemic)을 막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시스템이 운영될 때 가장 놓치기 쉬운 것이 사람일 텐데, 검사나 진료, 행정에 담당하는 모든 분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한다.
몇몇 외신은 물론 국내에서도 현재 우리나라의 감염 현황이 중국에 이어 세계 2번째가 되어 입국 금지나 제한하는 국가도 상당히 늘었다는 결과도 속속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확진자를 찾아내려는 그 노력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기본적인 검사 비용이 무료인 것은 물론, 검사 기준도 일본이 4일 이상 고온, 폐렴 증상을 갖춰야만 가능한 것과 대비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는 확진자 숫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사람을 숫자로만 계산할 때 도구화되며 지표화 된다. 확진자 숫자 대비 사망률로도 감염병의 경중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들과 관계 맺은 누군가는 1명이라는 숫자가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썼던 대로 미디어에서 계속 지나치는 죽은 사람의 숫자는 인간에게 죽음의 면역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만큼 죽음의 포르노, 노출이라 말할 정도로 현대 사회에서 나의 죽음, 내가 아는 너의 죽음을 제외한 수많은 타인의 죽음이 자리하고 금세 잊힌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태를 접근하는 정부의 노력에는 대유행을 막기 위한 전인미답의 노력 - 페스트, 스페인 독감, 홍콩독감, 사스, 가까운 예로 신종플루를 막았던 때와 비교하여 - 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대유행 막는 것의 다른 이유는 모두 차지하고 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엄중한 노력이 뭍어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중요한 자원이다.
빗대어 말하면 군대 전방부대에 있었던 나는 항상 그 얘기를 들었다. 일단 저기 눈 앞에 보이는 북한의 오성산에 포가 터지면 우리는 그냥 몇 초 안에 다 죽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몸빵이 되어 버티면 후방에서 반격을 준비하는 거잖아. 그때까지 우리는 버티는 거야. 말하자면 그 시간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전쟁이 점령과 승패라면 이번 사태는 치료제 개발의 시간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국지적 감염이 시작되기 전에 상당기간을 잘 방어해왔었다. 그것이 터진 뒤 현재는 치료제 개발까지 최대한 감염자 숫자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몇 주안에 백신이 나올 수도 있다는데, 그때까지 감염자를 방치해 놓으면 그들은 손 쓸 방법도 없이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에 감염 인원을 줄이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된다. 그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려움이 숫자에서 온다면 인간의 감동과 인간됨은 대부분 장면에서 온다.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사회제도에서의 개인이라는 인간으로서 보편성과 관계의 개별성을 모두 존중해야 하는 순간과 결부된다. 어떤 면에서 과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모든 전쟁의 원인이나 잘못을 따지기 앞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규약 된 형태가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입장에서 봤을 때 감동적인, 국가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는 상황을 제시했다. 벌써 한 명 한 명씩 불어나 17명이 된 코로나 사망자의 숫자, 그들이 기저질환이 있고 운이 나빴다면서 건강한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안심의 문장도 국가라는 공동체의 목소리에서는 삼가야 할 말이다.
인간의 가장 큰 가능성이 애도이며, 애도는 예술과 종교라는 형태로 발현될 때가 많았다. 현재는 합리적 혹은 세계적 종교로 자리하고 있는 어떤 종교들도 대부분이 정치체제와 결합한 형태로서 공중에 흩어지게 되었으며 야스퍼스가 말하는 '축의 시대'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혹은 종교라고 부르지 않은 신념체계가 지구의 인구수만큼 있을 것이며 그것은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죽음과 내세에 대한 근원적 공포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의 초극이나 표현으로서 승화가 예술이겠으나, 예술을 표현으로 국한한다면 종교는 그 신념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종교들은 교리상으로는 인간됨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고 가정과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그렇지 못한 것을 사회적 의미에서 사이비, 이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의를 통해서 사회적인 관습과 체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종교로 대표화되던 시기를 벗어나더라도 애도의 순간 종교는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엄숙해지는 문화적 관습은 태고적부터 갖춰온 인간의 마지막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음과 내세에 대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어떤 종교에 완벽히 의탁한 누군가나 죽음과 내세를 끝없이 성찰한 누군가에 가능한 일이거나 가능한 척할 수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건이 국내의 '종교'라는 것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1755년 리스본에서는 가톨릭,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난 사건이 벌어진다. 만성절이라는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 성당에서 예배를 진행하던 중에 큰 지진과 해일이 일어났는데 리스본 인구가 20만 명이었다면 거의 3~4만 명이 그 재해로 죽음을 당했다. 신학자들은 믿음이 부족한 이들 때문에 신이 벌을 준 것이라고 했지만 우연히 가장 피해가 적었던 곳은 그 시절 사창가 지역이었다. 칸트는 그것을 보고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내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과 같이 지구 내부의 구조나 해양판, 지각판 등의 판구조가 나오기 전이기 때문에 진술이 이치에 맞지는 않는다. 해당 재해의 발생은 칸트를 차지하더라도 그 시절 지식인은 물론, 대중에게까지 종교는 과연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불경을 갖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250여 년이 넘게 지난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물론 종교적 신념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걸을 때 만났던 신부와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나는 그에게 이틀 동안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와 만남을 우연이라 여겼고 그는 나와의 만남을 신의 은총이라고 여겼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른 해석이다. 그것은 개개인 삶을 주관하는 가치관의 영역이다. 신천지 사태나 교회에서 감염 가능성이 있는 것을 무릅쓰고 모임을 강행하는 것에는 종교적 신념이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이 두려움을 없애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감염을 막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이라는 이름 앞에 어떠한 행동을 벌이느냐로 신이 믿음의 여부를 판단한다거나 144,000명 구원자에 포함되기 위해서 대중의 도덕적 규율에 반하는 행동을 해도 된다는 신천지의 행위 양식에서는 개개인 가치관을 넘어선 타인에 대한 폭력과 피해가 더 크게 자리한다. 그럼에도 그곳에 종교적 신념을 구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로 인해 국내 종교에 있어서 이미 밝혀진 과학적 인식을 무시하거나 그것을 신앙의 부족으로 말하는 이들은 1755년의 상황에 한치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그때보다 너무나도 많이 변해왔다. 종교는 더욱 고립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현 상황에서 인간의 생명이나 종교적 신념이 아닌 자기나 속한 집단의 이익 획득에만 목말라있기도 하다. 국가가 두 동강이나도 권력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며 생명보다 위신, 사회보다 집단을 생각하는 이들이다. 전문가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며 국가가 판데믹을 막지 못해 방역에 실패할 것이고 관련자들을 탄핵해야 한다며 벌써부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다. 여전히 엄중한 이 시기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한 노력과 그 생명의 침해가 사회화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있고, 그 이면에는 생명과 세계를 주관하는 절대자로서 신을 자위적으로 해석한 이들의 행위가 있고 생명과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서 현실 권력의 갈구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모래성 위에 한 인간이 다시 위태롭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