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와 동시대
코로나 사태는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모두 끌어올리는 장이 되었다. 빨갱이라고 몰릴 만한 기본소득의 의제를 여기저기서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개혁세력, 글로벌로 봐서는 보수 정부에 가까운 현재 여당에서 전면에 부각하고 소위 보수라고 부르는 야당에서도 액수를 가지고 저울질만 할 뿐 가장 새로운 의제가 현실에 적용되고 있다. 소득도 아닌 무상 급식을 가지고 투표를 진행하거나 비용을 문제로 지방 의료원을 닫았던 정치인도 있었던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현재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재난 소득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기본소득은 한국 기본소득 네트워크의 정의에 따르면 아무런 구분 없이, 대상을 심사하지 않고, 세대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정의가 있다. 아무런 구분 없이는 때로는 국적을 불문하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누군가로 특정할 수 있다. 2016년 스위스의 성인 300만 원, 미성년 78만 원 기본소득의 경우 국적의 문제도 있었으며 재원 조달 문제에 있어 부결이 되었다. 대상을 심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득 분위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3월 30일 발표된 정부의 재난 기본소득 안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중위소득 150% 한에서 100만 원을 지급한다는 것은 소득 분위를 따진다는 것에서 기본소득의 취지와는 다르다. 물론 세대가 아닌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것도 다르다. 경기도의 기본소득 실험이 조금 더 포괄적이다. 물론 그것이 일회성이며, 기한이 있는 지역의 소비수요 창출을 위한 특정 화폐로 지급되는 것에서도 근본적인 기본소득의 원칙과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가 활발한 재난 기본소득은 일시적으로 지급되어 긴급 구호 목적 및 소비 수요 창출을 통한 소위 '승수효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정책으로 가능성이 크다.
승수효과는 곧 정부에서 100만 원을 지급해서 가계가 100만 원을 기업에 지출하면 기업은 다시금 100만 원을 기계나 임금에 활용하고, 그것이 또다시 100만 원을 벌어들일 수 있게 한다는 주로 거시경제를 다루는 케인스주의의 원리이다. 1929년 대공황 발생으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주장했던 고전 경제학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제시된 이론으로 현재 GDP를 측정하는 방식부터 국가의 재정 통계방식에서 가계, 기업, 국가로 나누게 되는 것까지 케인스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다. 항상 의견이 분분하나 케인즈의 유효수요 창출 방법을 활용해 미국에서는 임금 상승과 공공 일자리 확보 - 뉴딜정책 등 - 등을 통해 소비를 일으켜서 대공황을 탈출했다는 주장이 중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고전 경제학자들은 전쟁 특수에 따른 수요의 폭발적 증대로 일시적인 수요 공급 불균형이 해결되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케인스주의는 경제학 이론으로서 수요 창출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기존 19세기 말 프로이센 공화국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바이마르 헌법에 '복지국가'를 정의했다. 전후 서유럽과 북유럽의 사민주의 발달 등으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기초 생활비, 연금 등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 외부 충격에 따라 케인스주의가 비판받으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약 40년간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계가 글로벌화와 IT기술 발달에 힘입어 전 세계를 소위 자본화, 금융화하고 있다.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니즘에서는 복지나 사회를 없앴다. 대처의 유명한 말 '사회, 그런 건 없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철도, 수도와 같은 공공재를 민영화했으며 복지혜택을 줄이며 국가에 간섭을 받는 것이 자유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또한 관점에 따라 분분할 수 있다. 반면에 북유럽에서는 사민주의가 발달해서 복지국가 체계를 완료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복지국가 스웨덴의 경우에도 1900년대 중반까지 빈부격차가 심각했으나 헨리 조지의 지공주의 - 모든 잉여는 토지로부터 시작하므로 토지는 공적자원으로 여겨야 한다는 정신 - 를 받아들여 단 시기에 복지재원을 마련하고 빈부격차를 줄였다. 영미의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몰아칠 때 1980년대 근방부터 북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기본소득(Basic Income)' 운동이 점진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은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 - 출산이나 4인 가족을 기준으로 - 역할을 제외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 인권의 개념으로 다가간 첫 시도였다. 인권은 국민, 시민을 벗어난 한 인간, 곧 인민으로서 살 권리(right to live)에 대한 존중이다. 그리고 이는 소비수요에 따른 국가 재정의 확충에도 도움이 되며 선별적 복지 작업을 통한 행정비용 발생이나 복지 수혜자의 낙인 효과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국외의 사민주의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좌파나 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있으나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의 대표적 학자인 밀턴 프리드먼도 기본소득에 찬성했다. 그 이유는 바로 복지 재정을 단순히 함으로써 총 복지 비용을 줄여서 소위 작은 정부로 이행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프리드먼의 시기에는 이미 사뮤엘슨이 공공경제학을 통해서 공공재 서비스는 국가에서 어느 정도 대푯값을 가져야 효율적 배분에 이른다는 가설이 받아들여진 상태이기 때문에 아예 정부를 없애기보다는 최소한의 역할을 강조하는 편으로 나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벌어진 기본소득에서 그것이 좌파의 논리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화한 입장이다.
기본소득이 또한 케인즈와 다른 점은 바로 '노동'과 '소득'을 분리했다는 점이다. 미셸 푸코는 오랜 연구를 통해서 국민국가가 그동안 위생, 건강검진, 교육, 인구통계를 했던 이유는 곧 '노동력'을 확보해서 자본주의 경제를 지속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통치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곧 노동력을 통한 상품경제 순환에 역할할 가치가 있는 인간, 그리고 정상 가족에게만 복지혜택을 주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의 가치와 상관없이 살 권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는 글로벌 경제와 IT기술 발달에 따라 인구가 곧 노동력으로 직결되지 않는 현대 생산체계의 상황에서 노동과 분리해서 인간에게 살 권리를 부여하고 수요를 창출한다는데 맞춤형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소득은 비단 선진국과 중진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분배정치의 시대], 영문 제목명 "Give man a fish"에서 남아공에서 부모, 혈연과 관계없이 양육을 하는 누군가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상황이나 에티오피아에서 핸드폰에 현금을 바로 지급함으로써 기본소득을 운용하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개발도상국에서도 더 이상 복지의 혜택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물고기를 줘서 '살 권리'를 준다는 사례를 제시하며 기본소득 논의를 확장해가고 있다. 더 이상 수요의 창출이나 노동력의 유지를 통한 공동체 유지가 아닌 기본소득은 한 인간 존재가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입장에 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선진국이라 불렸던 곳에서 공공의료 서비스의 부족은 영미의 의료 민영화와 아울러 우리나라의 과잉 의료 논란도 있으나 최소 의료로 명맥만 유지했던 서구의 공공의료에 대한 문제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것이 SARS, MERS 등과 같은 전염병 상황을 겪었던 아시아의 경험이 낳은 결과일 수 있으나 쿠바의 사례에서 보듯이 단순히 경제 규모만으로 사회의 수준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노동이 가진 양면성도 포함한다. 제조업이라는 인간의 노동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유럽에서 미국, 일본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로 점점 이동했다는 것은 기업의 이익을 중시했던 글로벌화를 가장한 비용절감의 신자유주의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맨 위에서 높은 임금을 받는 유럽과 미국 등의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바탕에는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소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존재는 구분해야 하지만, 또한 노동의 적절한 가치도 함께 고려해야 함이 또 다른 사회과 공동체의 노력임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