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⑧_ 뉴노멀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COVID19와 동시대


철학자 푸코는 서구 근대성이 드러나는 장치를 병원, 감옥, 학교 등으로 정하고 그곳들을 근대적 인간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서 상품 경제를 만들어가게 할 수 있도록 신체 행위를 감시하거나 처벌하는 장소라고 정의했다. 병원은 근대적 의료 행위나 위생 방식 개선을 통해서 인구 통계학상 정상인인 국민 숫자를 유지하는 곳으로, 학교는 근대적 지식을 주입해서 노동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노동자 양성의 장으로 감옥을 기존의 고문과 같은 신체적 형벌과 달리 시간을 감금함으로써 경제활동이나 근대적 시민권을 박탈하는 방법으로 처벌했던 장소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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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이 생기고 철도가 만들어지고 다시금 영국을 중심으로 철도와 항공기 시간을 명확히 하려고 땅에는 없는 '경도'의 개념으로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24시간으로 나눈 뒤 경도 15도마다 1시간씩 차등을 주는 시차의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제 어디든 같은 기준의 시간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구가 과학기술과 근대적 시간성, 종교를 가지고 각 지역으로 침입했을 때 인류학자들은 그곳 사람들의 특성과 생활방식이 어떤지 연구하는 직업으로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편승한 학문으로 출발했다. 초기 인류학 연구 - 물론 요즘에도 아마존이나 원주민 연구를 하고 있으나 - 에서는 각 지역마다 특이한 시간이 있음을 발견해 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로잘도는 필리핀 일롱 고트 지역에서는 "언젠가 저 마을 화산이 터진 때" 혹은 "그 추장 집 둘째 아들이 태어난 때"라는 시각이 아닌 시점(타이밍)을 주요한 시간으로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인류학 연구자들은 그러한 명확한 시간이 아닌 시점으로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근대성이 우월하다는 진보/발전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독특한 시간을 만드는 방식은 점점 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초 일제 침략 후에 임금을 받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전달했는데 결코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겨우 100년 정도 된 일이라니.


이러한 시간은 단순히 무형의 생각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을 더 중요시 여기냐의 가치문제와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처음 백인들이 반짝 거리는 유리구슬이나 비눗방울 거품 등과 서구인들이 보기에 중요해 보이는 금이나 땅 등과 교환하기도 했었다. 귀금속이라는 변하지 않아 영원한 권력을 상징한다는 서구의 사상과 현재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하는 또 다른 곳의 사상은 가치에 대한 시간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차이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죽음이라는 시간을 어떠한 '순환'의 개념으로 보고, 죽음을 어떤 한 몸체의 죽음이 아닌 공동체가 겪는 일로 가치화한다면 근대적 '살인' 개념과 다른 형태의 행동이 드러나기도 한다. 앞서 제시한 일공고트 족을 비롯해서 몇몇 원주민들에게는 '헤드 헌팅'이라는 풍습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부족에서 우리 부족의 누군가를 죽였을 때, 살인자를 찾아 죽이는 것이 아닌 해당 부족의 불특정 인간의 머리를 사냥하는 방식이었다. 죽음은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의 영혼이 다른 몸에 스며든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한 부족의 영혼을 비슷한 것으로 보기도 했던 다른 생각의 방식이다.

그래도 죽음이라는 시점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지게 된다. 대부분의 예술과 종교 발달은 타인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 나타난다. 나의 죽음은 알 수 없고, 죽음 이후의 시간은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한다. 모르는 것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문학과 예술의 영역이라면, 모르는 것에 끝없는 의문을 품는 것이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는 사실로서 만들어 놓은 부분적 진실이나 알지 못하는 것에 숨은 거짓이나 그 무엇도, 죽음 앞에서 인간은 거짓을 말하기 어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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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발달한 현재,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미디어의 발달로 죽음이 너무 일상화되고 지표화 된 세상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죽음 말고 세계 곳곳에서 질병과 전쟁, 사고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죽음에 대한 애도 역치가 상승하는 무감의 세계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에게 가치관, 삶의 방식이 바뀌는 '순간'이 드물게 도래하는데 많은 경우 누군가의 죽음 앞에 놓인 자기 삶을 봤을 때이다. 혹은 동일한 조건에 놓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동질감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의 순간이다. 근대적 시간 속에서 속세를 떠나거나 아니면 지극히 개인화되어서 개인이 홀로 갖는 개인화된 시간이 발달할 수도 있으나, 현재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간을 목도하고 달력, 벽시계, 스마트폰으로 매일 시간을 확인하는 지금 대부분 인류는 '근대적 시간' '신체의 나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연결시키게 된다. 개인의 시간과 사회의 시간, 그리고 가치는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에 따라 2020년은 계기가 될 것이라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New Era)가 등장할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다.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기준으로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과연 어떻게 변화할까. 현재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금융시장은 급락한 주가나 시장가치가 코로나 전으로 빨리 복귀해서 계속 '발전'되고 '활황'이기를 요청한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정도, 국가의 재정정책, 그리고 현재 코로나에 대처하는 빼어난 국가적 상황으로 다른 나라 대비 급격한 불황의 신호는 없는 상태이다. 또한 중소상공인들은 일상으로 어서 복귀해서 사람들이 예전처럼 꽃구경도 하고 바깥에서 소비 활동도 하길 바랄 수도 있다. 자기 몸만 아프지 않고 회사에서 월급만 제때 나오면 때론 지금이 삶에서 느껴보지 못한 오랜만의 불편한 휴식 시간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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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결코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신체의 나이와 사회의 경험이 쌓일수록 시간이 급격히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첫째, 사유 속도의 감소라는 신체적 이유 둘째, 그간에 수많은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경험이기 때문에 기억에서 삭제되어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신체의 시간이나 휴리스틱스 한 입장으로 순간과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삶을 단조롭게 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 인간으로서 새로운 변화의 시작은 지금의 코로나 시점 - 무엇보다도 그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 에서 갑작스러운 인간의 죽음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최대한 아파하는 일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차가운 과학기술 시대, 우주 정복과 자연의 무한한 활용 시대, 발전의 시대라는 '발전하는' 시간성, 가치관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는 하루에도 감사하고 순간을 단순히 보지 않고 기억하고 다르게 사유해내는 것에서 그 시작이 열려 그나마의 더 나은 일상이 되길 소망해 본다.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것은 어쩌면 인류 보편의 한 인간을 소중히 한다는 가치관의 전파이며 누구나 다 눈물을 흘릴 수 있고 편히 숨을 쉬고 싶어 한다는 공통점의 직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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