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한 달 뒤면 나는 아이의 아빠가 되고 아내는 엄마가 된다. 아내의 부른 배가 더 불러오고 집안 곳곳에 아이의 물품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코로나 사태가 바꾼 일상의 흐름과 그에 맞춰 삶을 바꿀 아이의 등장은 새롭게 쌓이는 지층처럼 다른 삶의 근육을 요청한다. 아이의 세포 증식과 체중의 증가처럼 나는 아빠가 될 자세는 자라고 있을까. 자세에 앞서 나는 또 어떤 욕망에 걸려 넘어졌을까. 그 주춧돌은 내가 알지 못했던 울림이면서도 툭 튀어져 나온 돌기이기도 할 것이다.
꼭 1년 전 나는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호텔 내 이벤트로 비눗방울 쇼를 보러 갔다. 서른 명 정도 모인 쇼일까, 나는 아내와 함께 비눗방울 놀이를 감상하려고 했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아이들이다. 바로 터지기라도 하는 비눗방울처럼 부모는 아이를 달랜다. 아이는 금세 칭얼거린다. 아이에게 다른 세계는 없으며 부모는 다른 세계를 조금만 고려한다. 비눗방울이 우후죽순으로 터질 때마다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아이와 비눗방울 쇼가 어렵게 끝난다. 비눗방울과 개별 촬영을 위해 긴 줄을 선다. 부모는 둘만 있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 쇼에 조커같이 웃고 있고, 그들 앞에 놓인 동자승의 웃음을 기대하고 있다.
그때 나는 '왜 나는 아이가 없을까'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쉬 터져서 사라질 생각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털어놨다. 물론 2009년 결혼 이후 그 생각과 실천을 삭제해온 것만은 아니다. 나는 아이를 낳을 자격이 있는가부터 나는 아내와의 관계를 아이라는 울타리로 유지하려는 것은 아닌가, 나는 자유로움이 좋은데 과연 아이가 생기면 나는 어느 만큼 아이에게 잘못을 할까 생각했다. 나는 가정에 일반적인 충실함을 보이지 않고 선택적으로 관계에 기여했다. 통상의 가정과 달리 나는 집에서 음식을 담당하고 있고 그 일이 집안일 중 나에게 그나마 매력적인 일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의 성찰 법이라면 집안일은 성찰의 대상은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택했고 음식 일은 지겨운 집안일이 아니었다. 꾸준히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수단이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내 기준에 맞춘 역할과 헌신은 아내에게 분명 만족스럽지 못했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일로서 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가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언젠가 아이를 낳자고 아내와 합의한 뒤 끈기도 없고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뭐 그렇게까지 몸을 단속하며 아이를 가져야 하는가라고 나에게 우호적 반문을 했다. 특별한 노력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나는 마흔둘, 결혼 이후로 만 11년의 시간이 흘러 박제된 결혼사진 앞에 웃고 있는 아내와 나를 발견한다. 다행히 결혼사진 속 두 사람은 생경한 관계나 부부의 형태만 갖춘 관계가 되지 않고, 둘만이 아는 나름의 관계에 놓여있다.
어느 정도 행동이 변해 아이를 낳을 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와 아이가 생기면 태도가 변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다'라는 시간 감각에 동의했다. 또다시 나는 아내를 위한 특별한 태도의 변화 없이 변화가 태도를 만든다는 주장을 어린아이의 고집처럼 지켰다. 사탕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아스팔트 위 발버둥처럼 시간의 절벽에 다시금 관계를 내몰았다.
또 내 위주의 방식으로 가족 관계에 기여할 방법을 찾는다. 아이가 세계에 나오기 한 달 전, 이제부터 아침 가장 이른 시간에 삶의 가장 큰 욕망인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아내에게 아이가 반복하지 못하는 내 삶에 중요한 자기 계발 수단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는 그래 무엇이라도 바뀔 의지는 또 있는 거라며 추켜 세운다. 아침 한 시간 마음 근육을 새롭게 키우는 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