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 결혼했다. 아내는 스물일곱. 요즘 결혼 나이가 늦어진 것을 감안했을 때 둘은 이른 결혼을 했다.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결혼 후에 결혼 전을 돌아보며 말할 수 있지만 결혼 전에 결혼 후의 달라진 점을 예상할 수 없다. 특히 결혼 전과 후 생각의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살은 늘어가고 피부는 주름이 하나씩 생겨나지만 마음의 주름은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지인은 종교, 결혼, 육아가 삶에서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종교는 삶의 방향을 달리하기에 결혼은 삶의 관계를 바꿔놓기에 그럴 수 있다.
나는 서른 초반쯤 무신론자가 되었다.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무신론자로 바뀌었을 때 느꼈던 삶의 편안함은 또 다른 근본적인 불안이 있음을 느끼게 해 줬다. 하루하루의 삶을 미래와 내세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삶은 이렇게 유지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답하기 어렵다. 신의 뜻이라는 도맷금이 사라졌을 때 자유를 알게 되지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에 신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믿기 어렵게 된 신은 나에게 예전의 신은 아니다.
아이를 낳기 전 아내와 11년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서로가 가졌던 믿음은 좋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표현의 문제던 표현 이전에 생겨나는 마음의 문제던 말이다. 그렇지만 11년의 생활이 결코 맘에 들었을 리가 없다.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이해하려 했을까, 아내는 관계의 불성실을 또 삭히며 이해하려고 했을까. 이미 아내 인생의 1/3 이상을 나와 함께 보냈고 나도 1년이 지나면 내 인생의 1/3을 아내와 함께 하게 된다. 그 기간을 잃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일까. 부부는 가장 가까이서 해상도 높은 사진을 보듯이 장점과 단점이 모두 드러난다. 결혼이 제도로서 의무가 아닌 관계로서 향유가 된다면 행복한 일이다. 가장 큰 상처이며 힘이다. 많은 인간은 조금 더 나은 삶을 기대하다가도 그저 한 순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진다.
육아는 삶의 무엇을 바꾸어 놓는다고 할 수 있을까? 결혼하고 한 두 해 아이를 낳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신을 붙들고 기도를 했단다. 그리고 아들의 결혼 기간이 십 년을 넘었을 때 기도는 하고 있지만 손자의 탄생을 반쯤 포기했다고 한다. 다른 삶이 아무리 짜증스러워도 어머니는 뱃속에서 커가는 아이 '성큼'이만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고 했다. 다시금 어머니는 신의 뜻이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와 아내는 둘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유의지와 결정된 것 혹은 운명 사이의 교묘한 줄다리기를 어떻게 판단해낼 수 있을까. 통상 친구들은 나보다 늦게 결혼을 해서 나보다 일찍 아이를 가졌다. 그들은 결혼보다 아이를 가진 것이 더 큰 삶의 변화라고 말했다. 각자의 단어는 달랐지만 인생의 2막, 전혀 다른 세상, 혹은 전혀 다른 존재가 생겨난다고 했다. 그 이전 삶은 사라지게 된다. 나의 비루함을 처자식이라는 강력한 방어수단으로 설명한다. 그 비루함마저 아이로서 해결된다면 아이는 또 어떤 비루한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일까.
임신이 확정된 후부터 아내는 인터넷 카페 맘스홀릭을 저녁마다 접속한다. 글을 올리지는 않지만 자기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라도 그 카페에서 검색하고 확인한다. 그곳에는 주차별로 세밀하게 몸의 달라짐과 아이에 대한 감각을 담은 글과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아내는 어느 만큼 배가 커질 수 있느냐며 지금 주차의 배는 배도 아니란다. 다른 방식으로 나온 내 배와 자기 배를 비교하며 내가 몇 개월이라고 놀린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아내의 배보다 덜 나온 내가 됐지만 전혀 뿌듯하지 않다.
나는 줄어드는 배가 되어야 하고 아내는 살이 팽팽하거나 빵빵해지고 터져나가면서 배가 커지다가 일 순간 줄어든다. 그에 맞춰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음과 몸은 한계가 있다. 몇 년 전 아이를 가져볼까 생각해서 EBS 다큐인 아기성장보고서 책을 샀었는데 책장 구석에 있었다. 그 책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육아의 필수템이라며 통잠 - 아이가 중간에 깨지 않고 계속 자는 것 - 을 이끄는 책도 샀다. 2047년에 인구 절벽이 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예순이 되어야 아이가 성인이 될 텐데, 지금도 무너져 가는 대학은 여전히 건재할까, 그때의 세계는 어떻게 조립되어 있을까 생각한다.
아이는 어떻게 해야 사랑을 느끼면서도 독립적이 될까, 가족은 어떻게 해야 기쁨과 슬픔을 편하게 말할 수 있고 상처를 숨기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어떤 말이 아이의 생각을 제한하게 되며, 제한하지 않은 생각으로 얼마나 아이는 고심할까. 훈육은 유효할까. 수많은 관념의 말 뭉치가 여기저기 흩어진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어른이 꼭 되어야 하는가, 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무엇일까. 아이가 변명의 토대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 삶의 토대가 내 변명이 된다면 나는 변명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나 마흔두 살 이렇게 흔들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