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육아일기] 성별

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시험관 시술 병원에서는 성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이는 4개월 정도가 지나갔고 여성전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결혼 12년이 되고 첫 아이를 낳는데 남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도 아내는 아무리 시댁에서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아들을 바랄 것이고 첫째가 아들인 게 편하단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내던져진 삶에서 각자의 궤도를 가져야 하지만 성별은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불평등의 가장 근원적인 기제이면서 사회적 성역할을 두둔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자료와 연구에서 성별과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이지만 피부색과 성별은 신체를 가진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몫이되기도 한다. 특히 불평등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부각하는 것이 기존의 불평등한 기준을 만족하는 것이냐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화하는 것이냐에 대한 존재와 불평등의 문제에 언제나 부딪히게 된다. 사회의 진보는 바로 그 인간이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에 대한 공정과 이해이지 단순히 기회의 공정만으로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끝나지 않는 정의의 논쟁에 역시 '성'은 빠질 수 없다.


타고난 성품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만나는 엄마와 아빠의 행동은 모방에 결정적이다. 내가 깔끔히 정리하고 꼼꼼하게 챙기는 일이 서툰 것은 어릴 때부터 은연중에 있었던 남녀 역할 구분이 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무서움과 불안함이 내재해 있으며 주먹다짐보다는 말을 잘하는 것도 역시 가족과 사회적 훈육의 역할이 크다. 다시금 정의의 발달과 사회적 진보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조건을 기반으로 속단해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중지(에포케)할 여유에 달려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뱃속의 아이 '성큼이' 성별을 궁금해한다. 나는 다른 것보다 첫째가 아빠를 그렇게 닮는다거나 외모는 교차로 닮는다는 것 때문에 딸이 나오면 미안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농담조로 원가족 모임에서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니가 어때서?'라고 말한다. 내가 어떻다는 것은 아니지만 미안할 수는 있다. 아내가 매일 찾는 카페 맘스홀릭에서는 성별을 언제 가르쳐주느냐, 성별은 무엇이냐의 다양한 예상과 걱정의 주술들이 차고 넘친다. 내 아버지는 덮어놓고 '아들이다'라고 한다. 그가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온 우주의 기운이 아들로 넘치고 있다고 믿어버린 건지 종교만큼 근원 없는 믿음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알겠다고 넘어갔다. 장모님은 배 모양과 걷는 모습을 보니 아들이란다. 아내의 학교 동료 선생님은 얼굴이 환한 것 보니 아들이라고 한다. 엉겁결에 맘스홀릭 카페에서 육아용품 제휴업체의 응모에도 성별을 그렇게 넣으라 해서 일단 '남'으로 입력했다.


명징한 과학적 도구는 '딸'이라고 말해줬다. 복부 초음파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의 둔부를 비춰주며, 음 딸이 80% 정도 확실다고 말한다. 피식 웃음이 났다. 주변 사람들이 온갖 추측과 믿음을 만들어냈지만 아이의 성별이야 정자의 구분으로 이미 결정된다. 초음파 한 마디에 다들 입을 다문다. 다만 과학은 지표로서 무엇이 여성이다 무엇이 남성이다를 상당히 구분해왔다. 이러한 지표는 남녀의 성역할 이분법을 재생산해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어떠한 역할이나 역량의 구분을 굳이 남녀 지표로 나누어서 구분했다. 학업 능력에서 사회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성별 구분이나 취업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이 조금이라도 비율이 줄어드는 것을 역차별로 언어화하는 것은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후에는 사회적 요건이나 불평등의 기제가 개선된다면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구분이기도 하다. 동시대 남녀의 불평등보다는 더 강고한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지표의 오류가 만들어낸 근대적 불평등의 재생산은 [보이지 않은 여자들]이라는 책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아내의 난자와 내 정자가 만날 때부터 결정된 딸 성큼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불행은 바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다만 아이는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고 씩씩하게 걸었으면 좋겠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의 시대에 성별 구분이 어느새 유치한 과거가 되길 기대한다.

이전 05화[남편 육아일기] 육아의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