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원 졸업 이후에도 마음속 한편에는 건물 1층 퀴즈노즈 카페의 장면이 남아있다. 그 장면은 내가 아이 갖기를 겉으로는 자유와 선택으로 말하면서도 두려웠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아내와 아침 진찰을 마치고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을 주문해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 뒤편으로 젊은 여성의 푸념과 원망의 목소리가 있었고 그 앞에는 나이 든 여성이 있었다. 둘은 엄마와 딸 사이였다. 아마도 딸은 아내와 마찬가지로 시험관 시술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4번 실패를 해서 5번째 시도를 하는 중에 엄마를 만났다. 딸은 "어떻게 딸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먼저 연락도 없냐"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다른 핑계를 댄다. 무엇이 바빴다 혹은 무엇이 급했다며. 딸의 질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딸은 "어떻게 딸이 엄마한테 애원을 하느냐"라고 울먹거렸다. 내 눈 앞에는 토요일 아침에 텅 빈 버스와 도로의 한산함이 있었지만 등 뒤로 딸의 열망과 우울이 엄마의 무관심과 두리번거림이 있었다. 냉기와 한기를 한꺼번에 받아 어지러운 마음에 화장실을 가려고 몸을 일으켜 그 테이블을 지나쳐가는데, 왠 걸 모자를 눌러쓴 엄마가 나와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에로스던 아가페던 사랑은 둘이 한다. 사랑하는 남녀가 싸우는데 한쪽에서 갑자기 주변을 살피게 되면 그 관계는 깨지기 쉽다. 강자와 약자는 정해지며 약자는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 부모가 강자가 되어버리면 자식은 어디에 몸과 마음을 위탁할까. 그 지난한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쉬 판단할 수 없지만 나는 그런 부모가 될까 봐 두려웠었다.
그것은 가족관계가 애착이면서 사회화를 모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문대생의 1/3 이상이 우울증을 앓으며 급기야 엄마를 '맘충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자녀의 대학 수준을 집안 경영의 핵심지표로 내재화한다. 무한한 애착이 아닌 측정 가능한 사회화를 추진한다. 조건부 애착은 성적에 따라 부모 자식 관계의 편차로 귀결된다. 그것은 먼저 사회를 살아본 어른의 역할이면서도 사랑의 방식이라고 속단한 결과이다. 이런 사유의 정지는 극단적으로는 요즘 사회를 달구고 있는 입양의 사회적 인정을 가장한 아이 생명의 도구화와도 연결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까운 이를 서운하게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교만하지 말 것과 냉정하게 굴면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나는 때론 이기적이며 때론 감상에 빠진다. 감정 자원의 한계를 편리한 방식으로 배분한다. 바깥 약속은 거절하지 못하면서 집의 귀가 시간이 늦을 때가 많았다. 이 지점이 풀리지 않고 내 생각과 행동에 개선이 없다면 가족 관계는 어려워진다. 바깥에서는 좋은 사람이면서 안에서는 냉정한 사람이 된다. 아이가 가족 유지를 위한 울타리와 부담이 되고, 부모의 역할을 책임감으로만 느낀다면 아이는 나를 버팀목으로 삼을 수 없다. 그 또한 아내에게 변명하듯 아이가 나타나면, 달라진다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는 부족하다. 벼락치기로 시험을 대응하다 어느새 그 바닥이 드러난 때와 달리 나는 아이의 흰 도화지 같은 마음에 탄력성을 제공하고 마르지 않는 잉크가 될 수 있을까.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직면하며 등 뒤로 문제를 떠넘기고 가끔 고개를 들어 다른 문제를 중요하다고 변명하고 있다. 아직 서울역 차병원 퀴즈노즈 카페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장면을 포착이 작은 성공이면서 강력한 변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