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결혼 1년 차에 샀던 책들 몇 권이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다. [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정서지능], [아이의 자존감], [우리 아이 성장보고서]이다. 2009년 상당한 반향을 이끌었던 EBS 다큐멘터리가 책으로 나온 것이다. 아내는 결혼 초기에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다 혹은 자신의 업무에 활용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책을 샀다. 그 옆에는 [우리 아이를 위한 부부 사랑의 기술] 책도 있다. 미국 심리학자 존 가트맨의 기념비적인 저서이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아이를 키우는 것이 무조건적 기쁨이나 부모의 책무가 아니라, 삶의 급작스러운 어려움이며 부부관계의 위기라고 솔직히 밝혔고,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가 세상이 나오기 2일 전이 돼서야 그 책이 눈에 들어온다.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아이의 양육에 부부의 사랑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보다 아이에게 부모가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며, 부부 사이가 아이에게 본이 될만한 관계인가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번역자인 조벽 최성애 교수 부부는 역시 그 시절의 스승으로서 이혼율이 급격히 늘어간 한국 사회를 돌아보며 부부관계를 재정립할 것을 강조했다. 책을 펴보니 깔끔한 번역체는 이해를 돕기에 충분했고, 무엇보다 미국은 20년, 한국은 10년 넘어도 여전히 부부관계에서 변하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적절한 사례와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에 유익했다.
아이는 지성 혹은 이성을 이성과 지성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몸과 감정으로 구성해 간다. 세계가 곧 자신이 되는 비분리의 상황에서 부모는 절대적 환경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꾸미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자체 모습과 신체적 효과를 그대로 느끼고 모방하게 된다. 부부관계에서 갈등과 다툼은 아이에게 '믿을 구석 없음'과 '두려움'의 뉴런 구조를 구성하고 초기 3년 뇌의 형태를 만든다.
결국 아이를 잘 기르는 일은 부부 관계의 안정감과 사랑이 있음, 서로의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정상 가족 - 혈연을 바탕으로 한 부모 자식 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 이 한부모 가정보다 무조건 유리하다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애착과 사회화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나를 무한히 믿어주는 존재가 있음과 내가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데 적절한 본이 될 존재가 있음은 성역할을 떠나서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아내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근처에 옷을 사러 갔다. 아내가 없으면 나는 혼자 옷을 사지 않기 때문에 바꿀 때가 된 와이셔츠와 바지를 샀다. 점심으로 남아있는 과일과 아내 생일 케이크를 먹었다. 글이 여간 써지지 않아 나는 책을 읽고 아내는 신생아실, 모유 수유법에 관련된 영상을 봤다. 아내는 중고 물품이나 여기저기서 받은 육아 용품의 커버를 미리 빨았었다. 나는 역류방지 쿠션과 수유 쿠션, 아이 이불솜에 커버를 씌우고, 아이가 배냇짓을 하다가 제 풀에 제가 놀라서 잠을 깨는 것을 막는 마미 쿨쿨 매트(?)의 겉 천을 두른다. 저녁이 돼서 김치찌개와 생선구이로 밥을 먹었다. 다시금 동네 산책을 한다.
아내의 걸음걸이는 느릿하다. 아마도 아이가 생기면 몇 년은 느릿하게 걷게 된다. 빨리 걷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준다. 아내의 배 이곳저곳 살이 터졌다. 젖이 나오면 가슴이 더 커진단다. 성인이 되어 유일하게 성장하고 있는 신체 부위이기도 하다. 아내의 몸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 있다. 젖을 물리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다. 아이를 낳더라도 서서히 커진 배와 가슴이 갑자기 줄어들지 않고 또 나름의 생의 속도로 줄어든다.
오직 부부 관계는 서서히 쌓여있으면서 매일이 새롭다. 12년 전에 샀던 책이 고스란히 몇 번의 이사를 거쳐서도 다행히 가족의 책장에 그대로 있다. 책을 구매했던 아내의 정성에는 빛바램을 찾아볼 수 없다.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은 꽂혀있을 때는 부담이지만 읽을 때 비로소 새로움을 획득한다. 익숙하거나 게을렀을지 모를 아내와의 관계에서 노력은 곧 사랑이다. 잘못의 인정과 직면, 그리고 타협은 알지 못하는 격변에 그나마 버팀목이 되는 믿을 구석이다. 아이에게 믿을 구석이 되기 전에 아내와 나는 어떤 일에도 믿는 구석이 되는 사이인가? 며칠 뒤에 다가올 새로움 앞은 물론 오늘의 아내 몸의 변화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이로 나의 부족함을 전사할 것이 아니라 아내와의 관계를 더욱 직시할 것을 생각한다. 관계는 쌓는다고 흐려지지 않고 덮어놓는다고 잊히지 않는다. 갈수록 투명해지고 갈수록 두터워진다. 새롭지 않은 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