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거울같이 사람을 대하고 싶었다

1 듣고 말하지 않기


영화 <은교>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 은교가 돌산에 올라갔다가 거울을 떨어뜨리는데요. 남들이 보기에는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은교는 말합니다. “우리 엄마가 처음 생일 선물로 사준 거울이란 말이야!” 주인공 소설가는 노구를 이끌고 돌산을 힘겹게 타서 은교의 거울을 가져다줍니다. 또 다른 주인공 소설가의 문하생은 거울이 다 거울이지 뭐가 다르냐며 푸념을 합니다.


은교_NonDRM_HD.mp4_002080847.jpg 출처_https://m.blog.naver.com/kinmasters/130152053589


그 거울에는 시간이 묻어 있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거나 혹은 예전 같지 않은 엄마와 나의 관계가 묻어 있습니다. 아마도 은교는 그 거울을 보며 엄마의 손을 보고 선물을 받을 때 자기를 들여다볼 것입니다. 거울은 모래에 열을 더해서 투명한 유리를 만들고, 뒷면에 수은 칠을 해서 만들어집니다. 밖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볼 수 있도록. 이제는 거울 끝에는 또 다른 흙모래가 묻어 있습니다. 수은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부침들이 거울에 붙어있어 머릿속 기억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그 총체를 담았던 거울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재하거나 혹은 그때와 다른 어미의 대체제이면서 나의 불효함에 변명을 늘어놓을 상징물입니다.


고대 시대 거울 장인을 생각해 봅니다. 왕실에 공납할 귀한 거울을 만듭니다. 그는 귀한 청동을 구해다가 형틀을 만들고 은을 아주 부드럽게 갈고닦아 다치지도 않으며 쉽게 마모되지도 않을 은거울을 만듭니다. 몇 달이 걸릴 줄 모르지만 그는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고 복제할 수 없는 오직 하나의 거울을 만듭니다. 그것을 받아 든 왕실에서는 유품으로 간직합니다. 수많은 설화에서 등장하듯 왕실의 기운이 다해 왕족이 뿔뿔이 흩어지더라도 그 유품은 왕실 권위의 대체제이면서 유품을 쥐고 있는 이에게는 삶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굴곡진 은거울 면이라도 나를 보면서 왕실의 역사를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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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자리가 생각납니다. 회식자리 화장실에서 잠시나마 정신을 차립니다. 초라한 내 모습이 아니라 번듯하고 의기양양하고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 가끔은 뻔뻔한 얼굴로 갈아타려고 고개를 몇 번 가로젓습니다. 회사에서 몇 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풀고, 누구와 담을 쌓으며, 건배 제의는 어떻게 해야 벌주를 먹지 않을까,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을 주워 담아 봅니다.


추레한 옷가지와 조금 벌게진 내 얼굴. 화장실에서 세면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에 흠칫 놀랍니다. 이내 어푸어푸 얼굴을 씻기도 하고 화장을 고치기도 합니다. 보이기 싫은 혹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겹칩니다. 하룻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치고 간 거울, 나 말고는 내 모습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나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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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을 마친 퇴근길을 떠올려 봅니다. 어떤 물건으로, 병원 시술로, 소문난 영양제를 활용해서 나를 바꿔봅니다. 사은품으로 받았거나 어렵지 않게 집에서 구할 수 있는 거울로 들여다봅니다. 그것도 아니면 주상복합 건물 1층의 쇼윈도에서 나를 봅니다. 역사도 없이, 사연도 없이 쇼윈도 안에 물건들이 있습니다. 장인의 손길이 있는 고가품은 아니지만 물건을 삽니다. 수많은 물건의 유혹 속에 잠시나마 소비의 장면을 만끽하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나에게 그런 물건은 있을까. 은교가 펑펑 울면서 바랬던 거울. 왕실의 무게를 견딜 만큼 귀중했던 은거울. 장인에게 삶과도 같았던 세월이 붙어있는 거울. 나에게 그런 물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적 가치만 따지며 다른 가치는 삭제하거나 외면했던 행거에 걸린 물건들, 수납장에 숨겨 놓을 수 있어 가득 쌓인 물건들, 유행에 따라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체할 수 있는 물건들. 나는 그런 물건을 가질 여유는 있을까? 너와의 관계를 기념할, 살아갈수록 장면이 더 쌓이는, 누구의 가치도 아닌 나와 너와의 귀중함을 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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