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낸 제자백가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경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아 천도 한 뒤(동주시대)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국한 기원전 221년까지 500년이 넘는 긴 시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수많은 국가들이 탄생하고 사라지며 부족 및 도시 국가 수준의 문명이 치열한 경쟁을 하며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며 진보하고 변화하며 축적된 문명이 향후 중국문화의 근간이 되었고, 나아가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문명권의 기반이 되었다.
문명의 진보와 변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 선생과 학생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와 같이 다양한 학자들이 토론하는 것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춘추전국시대는 야만의 시대였고 피의 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인구는 2,000만 내외로 추산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5,000만 내외를 오가다가 명나라의 대에서 6,000만을 넘어서고 청나라가 들어서고 1724년에야 1억을 돌파했다.
중국 대륙의 그 넓은 땅에 2,000만에서 시작해 1억의 인구가 되는 것이 약 2,500년이 걸린 이유가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후문제가 있을 수 있고, 식량문제가 있을 수 있고, 질병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문제다.
중국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참혹한 내용이 많다.
우리에게 초한지로 많이 알려진 초패왕 항우의 경우 문헌상 20만이 넘는 비무장포로를 학살한 것을 비롯해, 우리에게 삼국지로 알려진 조조는 서주침공을 하며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런 학살은 중국 역사서에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공자와 논어를 이야기하며 이런 전쟁과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공자를 포함한 우리가 [춘추시대에 활동했던 다양한 사상 학파와 학자를 제자백가라고 한다.]라고 알고 있는 제자백가가 살아낸 시대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전쟁과 학살이 난무하던 야만의 시대였고 피의 시대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춘추시대에 제자백가의 탄생은 지금으로 치면 지역군벌이라고 할 수 있는 각 지방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찾는데서 비롯되었다.
공자는 각 지방의 봉건제후들에게 인기 있는 인재였지만 능력이 너무 뛰어나 부담스러운 인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고려말에 전파되어 조선시대에 융성했던 주자학으로 인해 현실과 동떨어진 배타적이고 이념적인 학문으로 알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공자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보면 주자학이 이야기하는 공자의 가르침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죽기에 딱 좋은 이야기다.
지금 당장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야만의 시대에 도덕이 어떻고 군자(주자학에서 이야기하는 군자의 의미로서)가 어찌해야 한다고 공자가 이야기했다면 쓸모없는 헛소리를 한다고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당시로는 드물게 71세의 나이까지 살았고 수많은 제후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물론 공자가 키운 뛰어난 제자들의 덕도 있었지만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제후들이 보기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고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자의 제자가 출세를 해도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인데 공자의 가르침이 제후들이 보기에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쓸모가 없다면 누가 그 제자들을 존중할 것이며 그 스승인 공자를 존중하겠는가?
그럼 공자의 가르침이 무엇이길래 춘추시대 눈짓하나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던 제후와 공경대부가 그를 존중하고 가르침을 청했을까?
이것은 반대로 제후와 공경대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로 질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춘추시대는 주나라라는 구심점이 있던 시대가 지고 지방의 제후들이 스스로 힘을 기르던 시대다.
현대로 이야기하면 회사를 다니던 회사원이 회사가 망하면서 각 사업부를 분리해서 스스로 창업을 하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각 사업부의 구성원들을 잘 다스려서 큰 회사로 키우는 방법일 것이다. 즉 춘추시대의 제후들은 주나라의 영향을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로 독립을 했으니 백성을 잘 다스려서 국가의 힘을 키우고 천하의 패자가 되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제후의 요구가 명확하고, 이런 요구를 가진 제후들이 공자와 공자의 제자들을 존중했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 제후들의 요구와 완전히 일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가르침과 논어에 나온 공자의 언행을 살펴보면 공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배타적인 탁상공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했고 제후가 나라를 다스리고 부강하게 만드는 제왕학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제자백가의 가르침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백가, 그들 모두 춘추시대, 그 야만의 시대에 제후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마지막 지향점은 제후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자와 논어를 현실과 동떨어진 배타적인 탁상공론으로 오해를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유교적 전통이라는 것이 형식에 치우치고 쓸모없는 것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송나라 시대에 현실과 괴리된 글로만 유학을 배운 주희에 의해 탄생된 학문체계가 조선에서 번성했기 때문이다.
주희의 주자학(국내에서 성리학이라고도 함)은 공자의 가르침을 해석한 여러 가지 아류 중 하나로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제왕학을 선비가 스스로를 가다듬은 수신의 학문으로 변질시키고 현실과 동떨어진 배타적인 탁상공론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학문의 다양성을 외면하고 오직 주자학만 파고 들어간 조선의 선비들도 공자의 가르침을 현실과 괴리된 배타적인 탁상공론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