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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종문 Feb 22. 2016

2016_010 공부의 배신

왜 하바드 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러저위츠 지음

이 책의 원제는 '엑설런트 시프 (Excellent Sheep)'라고 합니다.

이 책의 여는 글에 언급되는 '말입니다.

저자가 예일(Yale) 대학에서 자아성찰 능력은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핵심적인 전제조건이며, 자아성찰의 주요한 전제조건은 고독이라고 주장했을 때 한 학생이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저 똑똑한 양떼(excellent sheep) 불과하다는 건가요?"


양( sheep)은 순종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부모나 선배 등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시스템에 의문을 품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따라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마치 양치기를 따라가는 양과 같이...


대학이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진정한 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우리를 "독사 (doxa : 어떠한 대상에 대해 상식적으로 품게 되는 견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가 그것을 깨닫도록, 그것에 의문을 품도록, 그것에 대해 자기  방식대로 사고하도록 가르쳐줘야 한다.

습관적으로 의심하고 이러한 의심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을 개발한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치바니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읽었습니다.

https://brunch.co.kr/@jupiter/41

다치바니 다키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공부의 배신'과 유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대학이라는 곳은 단순하게 그동안 축적되어온 지식을 머릿속에 축적만 하는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쿄대나 미국의 예일, 프린스턴, 하버드,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학의 간판을 만들어 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대학이 좋은 직업이나 직장에 대해 답을 주지만 교육의 목적이나 삶의 목적과 같은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대부분이 순한 양으로 1등급 목장( 명문대)에서 키워져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얻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에서는 내가 살아갈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양이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견디는 방법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  불확실성을 얼마나 잘 견디는가에 따라 당신이 누구인가가  결정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공평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고난 복은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창조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열정을 품고 그에 따를 수 있다는 것은 궁극적인 특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을 비난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 자신의 삶을 창조할 자유]  이 부분이 제가 이 책을 읽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다음 문장을 이해할 수 없다며 저에게 질문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창조하라는 건 무엇이든 원하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란 뜻이 아니다. "노력 앞에 불가능이란 없다." 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다."는 말은 요즘 아이들에게 주입되는 일종의 '신화'다. ]

아이는 자기가 생각할 때 '노력 앞에 불가능이란 없다." 또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재능이 없으며 노력해도 안되다는 것인지 정확한 의미를 해석할 수없다는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이 책을 모두 읽어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글의 초점은 네가 본 앞부분보다 뒤에 나오는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낸다는 뜻이기도 하다."에 있는것 같다.

이 책에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공평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고난 복은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재능에 가장 초점을 두고 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열심히 산을 오르는데 내가 오를 정상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가는 것과 목적 없이 그냥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삶을 목적을 찾는다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찾아진다면 누군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순종적인 똑똑한 양의 삶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아이에게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정확한 설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 아이와 점심시간 내내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노파심에 아이에게 추가로 이야기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 자신의 재능이나 자신이 잘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것들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노력의 흔적들은 본인의 내적 역량으로 남아 있게 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먼저 죽도록 노력해보고 판단을 해봐라.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결국 남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그 일에 재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그 노력의 결과는 다음 노력의 든든한 기초가 될 것이다.

네가 의문을 느낀 189p~190p의 마지막에도 이런 글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라는 건 게으름을 피워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언제나처럼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기에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교육제도의 문제로 인해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로 변해간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아이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목적의식을 갖도록 키워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 미국 교육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은 미국인이나 미국 교육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접근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점을 몇 년에 걸쳐 주변에서 지켜보았고, 다치바니 다카시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읽고, 이번에 [공부의 배신]을 읽으며 느끼는 공통점은 한 가지였습니다.

대학교육이 학생들을 인간으로서 성장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직업인이나 직장인으로 정형화하여 만들어 가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이것이  오래되었고 우리나라도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업시대에는 이것이 사회 시스템을 원활하게 움직이는 좋은 방법이었는지 모르지만 피터 드러커가 이야기한 지식시대가 도래한 현대에는 개별적 인간들의 독창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교육에 대한 다양한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라는 곳에서  멀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이제 대학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은 알겠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 오래전에 문제점을 알고도 수정 못하고 있는 이때 대한민국 대학에서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교육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부형으로서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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