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진 May 08. 2022

나의 '망나니' 같았던 수험생 시절

사람은 변한다.



 갑자기 생각하니 너무 웃음이 나고 어이가 없어진다.


 나는 살면서 고3 때 가장 많은 잠을 잤었다. 게다가 시험기간엔 더 많이 잤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엄마, 나 00시에 깨워줘."하고 교복을 입은 채로 잠이 들어서 다음날 학교 가기 전까지 잤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너 고3 때 내가 너 깨우다가 나는 밤새 잠을 못 자고, 너는 아침까지 잤다."라고 하신다. 아침에 일어나 후다닥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아주 잠깐 책을 봤다. 그렇지만 나에겐 혜란이가 있었다. 나와 혜란이는 고1 때와 고3 때 두 번 같은 반이었는데, 혜란이는 반에서 1등, 전교에서 손꼽히는 공부 잘하고 매우 착하고 예쁘고 착한 친구였다. 아마 혜란이는 고3 때 나와 같은 반이 또 되었다는 걸 알고, 엄청나게 좌절했을 것이다. 고1 때부터 매번 숙제가 뭐냐고 전화해서 물어봤었고, 시험 당일날엔 내가 쉬는 시간마다 시험에 나오는 게 뭔지 찍어달라, 설명해 달라고 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싫었을까 ㅠㅠ 너무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혜란이와 나는 성이 같고 이름 초성이 비슷해 자주 짝꿍이 되었다. 너무나도 성실하고 착했던 혜란이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면 단 한 번도, 진짜 조금도 싫어하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반면 나는 정말 불성실하고, 수업시간마다 잘 수 있으면 잠을 잤고, 시험 때는 몇 배로 더 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를 안 한 스트레스성 과수면이었던 것 같다. 한 번에 다 하려니 손을 못 대겠고 모두 내려놓고 잠을 잔듯하다.)


 시험 날, 아침부터 와서 공부하고 있는 혜란이에게 요점정리를 해 달라고 하면, 혜란이는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을 요점만 쏙쏙 정리해서 설명해주었다. 귀찮은 티조차 한 번도 낸 적이 없었고, 혹시나 자신이 설명한 것이 시험에 조금 다르게 나오기라도 한 날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기까지 했다.


 졸업 후에 길을 가다가 혜란이를 만났다. 혜란이는 S여대 법대를 장학생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혜란이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어봤고, 연락했지만 답이 없었다.

정화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혜란이가 떠올랐고, 너무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연결되어있는 에너지장을 통해 사죄하고 축복의 기도를 보낸다.

(혜란아, 너무 미안했어 ㅠㅠ 내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생각날 때마다 널 위해 기도할게...ㅠㅠ)

아마 혜란이는 지금쯤 멋있는 법조인이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시절 성인군자 정도의 덕을 갖추었던 혜란이, 나에게는 학창 시절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혜란이에게 나는 최악의 친구(?)였을지도.. 얼마나 나는 혜란이를 위해 기도해야 할까.



 나는 여고에 다녔었는데, 고1 때 담임선생님은, 그 해 첫 담임을 맡은 당시 서른 살이던 남자 체육 선생님이셨다.

평소에는 우리들을 많이 예뻐하셨고, 내가 교복을 줄여서 등굣길에 학생주임 선생님께 뺏기면 직접 다시 찾아 주실 정도로 각별히 신경도 써 주셨다.


고1 입학하고 4ㅡ5월경 즈음에.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나는 생각 없이 살았다.

쉬는 시간마다 말뚝박기를 해서, 교복 치마 안에 거의 체육복 바지를 입고 살았다. 쉬는 시간 종이 땡 치면 바로 시작을 하기 위해서이다. 1분 1초가 아까우니, 종이 치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게 늘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하루는 학교에 화투를 가져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들이 모이면 어른들은 집안에서 화투를 자주 치셨는데, 돈을 따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셨기 때문에 화투판을 지켜보고 있다가 배운 것이다.

사회 지리 선생님은 갓 부임한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교복 치마를 조금 걷고 앉아서 화투를 치면 못 본 척하셨다. 그래서 맨 뒷자리에 앉아 친구들이랑 고스톱을 치다가, 지나가다 교실 안을 들여다보시던 담임선생님한테 걸려서 골프채로 엉덩이와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맞은 기억도 있다. 울면서 3대 정도 맞고 들어갔는데, 고스톱 가져온 새끼(당시 선생님 표현ㅎㅎㅎ) 나오라고 해서.. 나는 2대 정도 더 맞았다. 정말 죽도록 아팠고 2주 정도 의자에 제대로 앉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지리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죄송하다.


고3 때의 나는 최고로 살이 쪘었다. 지금보다 4-5킬로 정도 쪘었는데, 인생 최대의 몸무게였고 나는 살이 찌면 얼굴부터 찌는 체질이라, 나의 졸업앨범에는 뚱뚱한 내 얼굴 사진만 잘라 버려서 나만 없다.

당시 남자 사람 친구가 B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내가 가면 빈 공간 없이 아이스크림을 최대로 꾹꾹 눌러서 돌덩이처럼 담아주었다. 그 당시 나는 엄마랑 동생이랑 주 2-3회씩, 한 번에 그 돌덩이 같은 파인트를 1인당 한통 이상씩 먹었다.



 재수 시절에는 한 학원에서 3명의 남자 친구와 (한꺼번에는 아니고, 순서대로..) 만났다.

엄마는 열과 성을 다해 점심 저녁으로 도시락을 2개씩이나 싸주셨는데, 나는... 노는 게 너무 재밌었다.


 수능 시험 전날, 친구가 도시락을 못싸간다는 이야기에 엄마께 친구 도시락까지 싸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도시락이 하나 더 들어갈 큰 가방으로 가방을 바꾸고는, 도시락만 챙기고, 수험표는 옮겨 담는 것을 깜빡했다.

시험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친구에게 도시락을 건네며 갑자기 생각이 났다. 수험표를 안 가져온 것이..

너무 태연하게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엄마는 잠옷 바지에 내 겨울 잠바를 걸쳐 입고 경찰 오토바이 뒤에 타셔서 나보다 먼저 시험장 앞에 도착해 수험표를 휘날리고 계셨다. 옷 갈아입으실 정신도 없어서, 보이는 대로 입고 나온 것 같았다. 엄마한테는 최고로 감사하고 최고로 죄송하다 ㅠㅠ


 여기에 담지 못하는 정신 못 차린 일화들도 많다. 생각해 보니 엄마한테 정말 죄송하고 감사할 일들이 많구나.. 엄마가 학교에 불러오신 날도 있었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던 학창 시절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아주 아주 늦게나마 '나'라는 사람을 찾아가고 인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훨씬 더 늦게 성장했지만 사람마다 성장 속도는 다 다르고, 누구든 변화할 수 있는 것 같다.


결론은 나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나 정신 못 차리던 내가 이제는 명상이란 게 좋은 걸 보니.









작가의 이전글 매력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엄청 잘하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