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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26. 2021

이제껏 이런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이영애 VS 김혜준

JTBC 드라마 <구경이> 리뷰


배우 이영애의 이미지는 <대장금>의 지순함과 <친절한 금자씨>의 잔혹함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물론 나는 ‘금자씨’에 더 매력을 느낀다. 단아한 장금의 이미지를 단번에 박살낸 ‘금자씨’의 그로테스크함이야말로 단연 이영애의 독보적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불결하기 이를 데 없고 게다 똘기까지 충만한 ‘히키코모리’로 JTBC 드라마 <구경이>에 등장했다.      


어찌 보면 어색하기도 한 이영애의 부스스한 심드렁함은 의외로 드라마에 신선함을 제공하는데, 게다 한국 드라마로서는 극히 보기 드문 여자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콜라보시키면서 <구경이>는 매우 색다른 서사를 견인하고 있다. 압도적인 캐릭터로 대담한 시도를 한 것치고는 시청률이 딱하지만, 어쨌거나 걸출한 두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괄목할 만하다. 지금껏 어떤 한국 드라마에서 여자 ‘또라이’와 여자 ‘또라이’의 대결을 핵심 테마로 가져간 적이 있던가.      


격돌하는 여성 캐릭터, 어설픈 탐정 VS 귀여운 사이코패스 살인마   

    

유능한 경찰이었던 구경이(이영애)는 남편이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며 불행이 시작된다. 남편의 비극 이후 경찰직을 이어갈 수 없었던 구경이는 자신을 스스로 집에 유폐시킨다. 과거를 단절시킬 유일한 방법은 게임. 어느덧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에 몰입하는 게임광이 되었다.     


게임에 빠져 자신과 살림을 돌보지 않는 구경이의 집은 사람이 산다고 말하기 무색한 벌레가 들끓는 집이다. 히키코모리형 남자 게임광이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지만 여자 캐릭터로는 드문 설정이다. 게다 단아함과 신실함으로 표상되는 이영애가, 목이 축 늘어진 남루한 티셔츠와 낡아빠져 무릎이 쑥 나온 고무줄 추리닝 바지에, 언제 감았는지 알 수 없는 쑥대머리를 하고 드라마에 등장했으니, 이만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다.    

  


구경이가 이 지경으로 폐인 모드가 된 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남편이 의혹에 싸인 스캔들에 연루되자 타고난 ‘의심 병’을 가진 구경이는 남편을 취조하기에 이른다. 남편은 자신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대신,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아내 구경이를 배신한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은 공정한 수사를 진행하던 구경이를 ‘남편 잡은 여자’로 전락시킨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경우, 경찰인 아내는 남편의 혐의를 무마하거나 은폐시키기 위해 자신의 직을 걸고 뛸 것이라 예상될 것이다. 게다 남편의 혐의가 성폭력에 연루되었다면, 더욱 물불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를 꽃뱀으로 만드는 전략을 취하리라 기대될 것이다. 남편이 죄인이더라도, 세상 모두 손가락질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아내는 남편을 감싸고 그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 유구한 가부장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이는 이런 오래된 주술을 걷어내고 오직 수사관으로서 남편을 취조한다. 이것이 비난받을 일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강직한 경찰이더라도, 철석같이 믿었을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을 남편의 혐의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수사관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공정히 수행하려 했고, 성폭력의 경우라면 특히, 어떻게 피해자를 보호하고 범죄를 밝혀내야 하는지를 숙지하고 임했을 것이다. 남편이 돌연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지 모르나, 세상은 구경이가 무리한 수사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힐난했다.      


어떤 강심장이라고 해도 배우자의 죽음에 태연할 수는 없다. ‘의심병’으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게 더 큰 고통은 어쩌면 남편이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상당히 합리적인 추리에서 비롯된다. 그 어떤 남자도, 게다 피해자가 권력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는 경우라면, ‘그 사람은 결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섣부르게 결론지을 수 없다는 것을 구경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망 높은 남편이 성폭력을 저질렀음이 정황과 증거로 밝혀졌음에도, 성폭력 따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하는 많은 아내들을 사회는 목도해왔다. 남편이 파렴치한 범죄자더라도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내의 선택이고 권리일 수 있다. 그러나 버젓이 벌어진 범죄를 무화시키거나 피해자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      


무도한 부정(婦情)보다는 공정한 부정을 택한 구경이의 선택은, 그간 사회에서 벌어진 무수한 성폭력에서 드러난 아내들의 몰이성적인 태도를 돌아볼 때, 함의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남편을 의심하고 추궁한 구경이의 몰락은 어쩌면 가부장을 거부한 아내에게 내린 형벌일지 모른다. 피해자를 꽃뱀으로 만들어 남편을 구하는 대신, 막돼먹은 아내가 될지언정 부정의한 가부장의 수호자가 되지 않은 구경의의 캐릭터가 남루한 삶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이유다.      


“어디 죽일 놈 없나?”, 오늘도 죽어도 싼 놈을 찾아 죽이는 사이코패스


반면 드라마의 또 다른 핵심 축인 이경(김해준) 역시 지금껏 한국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부모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잃고 그 특정 시점에 자신을 묶어둔 채다. 어느새 “죽일 놈만 골라 죽이는” 사이코패스 살인광이 된 그는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타고난 DNA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트라우마가 발현되며 살인을 추동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꽤 어릴 적부터 살인의 기억을 가진 소녀였을 이경은 매우 치밀하게 살인을 기획하고 이 기획을 게임처럼 즐기는 살인광이다. 사악한 사이코패스지만 그에겐 죽일만한 놈만 골라 죽이는 나름의 철저한 원칙이 있다. 물론 그 원칙은 자의적이고 그래서 문제적이지만, 그가 죽인 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때 일면, 죽어 마땅한 자들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의 자의적 판단으로 저지르는 살인이 정의감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그가 살인의 과정을 즐긴다는 데 있다.  

     

지난 5월 종용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에서도 사적 복수를 서슴지 않는 집단이 등장한다. 사적 복수라는 설정은 낯설 것이 없지만, 이들 집단이 피해자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특별한 복수 팀의 면모를 가지게 된다. 악인을 처절히 응징하는 이들의 폭력 역시 자의적 판단으로 악인을 처단한다는 데 있어 문제적이고 상당한 논쟁거리를 안고 있지만, 무능한 공권력이 해결하지 않거나 못하는 악당을 기꺼이 일소하는 데서, 시청자는 어쩔 수 없는 카타르시스에 젖어든다. 누가 피해자의 고통에 이들처럼 개입했단 말인가.  

    

이들의 자의적 처단이 분명 상당한 위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청자가 그들의 처단에 일정 정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공권력의 무능에 대한 지탄과 악당을 처단하는 그들에게서 폭력을 즐기는 쾌락을 발견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즉 사람을 해치며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경은, 어릴 적 트라우마가 충분히 소명되지 않은 채, 어쨌거나 사람을 죽이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몹쓸 사이코패스다. 그렇지만 이경의 사이코패스를 그저 사이코패스라 부르기에는 뭔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의 살인에는 혐오를 밑절미 삼아 약자를 죽이며 우월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의 탈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약자를 고르는 사이코패스의 전범을 버리고, 비록 처단하기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완벽한 지능적 수단으로 악한을 처단한다는 데 있어, 기존의 약자를 가해하는 유혈 낭자 사이코패스범과 상당한 이격을 벌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그저 그런 사이코패스의 자리에 이경을 선뜻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기존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는 식상하리만치 유사했다. 우선 이들은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이고 이들의 유구한 흔적은 그 옛날 <살인의 추억>에서부터 <악마를 보았다>, <추격자>, <암수범죄>의 치 떨리는 연쇄 살인마들까지, 그리고 드라마 <터널>, <보이스>, <리턴> 등에서 무수히 재현되며, 그야말로 역겨운 여성 혐오 살해를 역겹게 전시해왔다. 피해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토록 잔혹하게 소녀나 여자를 살해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것이 마치, 그들의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고 하는 듯이 위선을 떨면서 말이다.     


이렇듯 오랫동안 전범이 된 여성 혐오 남자 사이코패스의 전형에 균열을 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여자 사이코패스 이경은 획기적이고 새로운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그는 약자를 선택해 고문하며 유혈을 짜내 희열을 느끼는 악마성을 탈각한다. 그가 처단하기위해 고른 악한은 반듯이 죽어 마땅한 죄과를 가지고 있고, 더 특이한 점은, 이 사이코패스가 피해자의 동의와 동조라는 심리적 유대감을 획득한다는 데 있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죽임으로써 쾌락을 얻는 지질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악한) 존재를 처단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는 데서, 기존의 여성 혐오 살인마와는 상당히 결을 달리한다. 살해 자체에 방점을 찍는 다기 보다, 악당인 가해자를 제거해 피해자를 본래의 삶으로 복귀시킨다는 데에 강한 동기를 보인다. 바로 이 점이, 약자의 피해를 향한 섬뜩한 가긍함이, 이 야릇한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차별점이자, 사이코패스라고 무턱대고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어우,,, 물론 그렇다고 이경의 살인 행각이 용서되거나 지지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를. 주목할 것은, 이경의 사이코패스다움이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여자 사이코패스의 지평을 열고 있다는 것이며, 이 교활한 사이코패스를 잡겠다고 은둔하던 방구석을 박차고 나선 구경이 역시, 어쩌다 탐정이긴 하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여자 탐정 상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다소 부진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혜성처럼 등장한 두 여성 캐릭터 구경이와 이경의 엎치락뒤치락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과연 이 걸출한 두 인물이 어떻게 격돌하며 서로에게 문신 같은 경험을 새기게 될지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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